기타/나칼Naacal

광개토왕의 족보

라무네 종교tv 2013. 1. 8. 21:27

'우리역사의비밀'에서 퍼온 글. 다른 일로 우연히 그 곳에 다시 들렀다가 예전에 올라 왔었던 이 글(광개토호태왕의 족보)을 퍼왔습니다.

'박창화유고집' 중의 '고구리사략'을 기어코 출판한답니다! 곧(2008. 08) 나온답니다. 이 인간들 (제가

웬만하면 이런 거친 표현 안씁니다.) '얼 빠진 놈들' 임에 틀림 없습니다.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매국

노 보다 더한, 인류에게 백해무익한 인간 같지 않은 것들입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도 모르고, 가

르쳐 줘도 '쇠귀에 경 읽기'입니다. fact와 역사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역사를 하는지도 모

르는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도 책 한번 낸다.'라는 지극히 사적이고 사특한 욕심에 양심이고 도덕이고 뭐고 간에 다 던져버린

짐승 같은 놈이라는 생각 밖에 안듭니다. 그 인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철학이 어떻고 하는 인간

도 마찬가지. 그 인간이 뱉어 놓은 소리를 볼 것 같으면, 앞에말 뒷말이 서로 다르고 무엇을 말하는지

자기 자신도 헷갈려 하며 결론적으로 약육강식이 진리라는 말로 밖에 안 들립니다. 그 인간 말대로라

면 그 사이트의 존재 이유가 없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왜 사회를 이루어 살아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법률이나 윤리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일제의 침략에 어떤 항의도 해서는 안되고 그

게 불만이면 우리도 침략하면 된다라는 주장입니다. 이방원의 하여가는 저 인간의 헛소리에 비하면

아주 양반입니다.

그 인간이 저런 말을 하게 된 경과도 이렇습니다. 제가 여러번에 걸쳐 출간을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

을 했음에도 눈하나 깜짝 안하고 무시하다가, 제가 마지막으로 올린 글에서 "~ 설사 제가 그러한 마

음을 품고, 감추자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해 보입니다. 번역하는데 들

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양심이 찔리기도 하고 변명

도 겸해서 저런 헛소리를 지껄인 것입니다.

저의 성향(무정부주의, 박애주의, 종교주의 등등)은 그 곳과 맞지 않는다 할 수 있으나, 그 곳에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이로움만 주었었고 앞으로도 이로움만 주었으면 주었지 해로움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그곳을 떠난 것이기도 합니다. 허나, 그 인간은 민족주의의 탈을 쓰고 민족과 인류

에게 해가 되는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저자나 사이트 운영자나 출판사나 출간을 축하하는 인간들 모두,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석화

된 무생물임에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진서이든 위서이든, 그런 포르노서적을 출간해서 무슨 이익을

얻고자 함인지? 분명, 득 보다 실이 클 것입니다. 화랑세기는 저 사략에 비하면 아주 양반임에도 불구

하고 많은 논란에 휘쌉였으며 결코 정사에 끼이기 힘들어 보입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비해 완전한

포르노인 저 물건은 어떻게 사회에 받아 들여질까요? 진서 위서 논쟁에 앞서, 사료로서의 가치 평가에

앞서, 우리가 그것을 논쟁의 대상에 넣어 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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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광개토 호태왕의 족보 - 글쓴이 : EyeOfSpirit (2008-01-07 14:58:54)

요것도 같은 카페에서 퍼온글입니다.
수메르의 신들도 근친교배를 많이 했는데
고대에는 근친은 특정 종족의 종족보존의 의미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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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호태왕의 족보

박창화의 기록에 의거한 고구려 왕계표로, 주몽으로부터 광개토호태왕의 조부 사유(고국원왕)까지의 족보입니다.

모본왕, 고국천왕 등 광개토호태왕과 상관없는 왕들은 다루지 않습니다.

주몽왕 - 부 '해모수', 모 유화

유리왕 - 부 주몽, 모 예씨(예소야)

대무신왕 - 부 유리, 모 - 부여 송양왕의 딸 송씨

'신명왕' --- 부 대무신왕, 모 갈사후.

신명왕은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삼국사기에 안 나오는 왕이기 때문입니다.

대무신왕 무휼의 여러 처들 중에 갈사후라고 있었는데, 이 갈사후의 족보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갈사후의 아버지인 해소는 '주몽' 드라마에 나온 '영포'라는 인물과 동일인입니다. 다만 코믹캐릭인 영포와는 달리 실제 해소는 꽤 신중했던 사람인 듯합니다.

그런데, 해소, 즉 영포의 실제 어머니는, 유화입니다. 즉 해소(영포) 는 금와왕과 유화 사이에 난 아들로, 주몽과는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입니다.

따라서 무휼의 후궁 갈사후는 금와와 유화의 손녀이고, 무휼에게는 숙모 뻘이 됩니다. 아마도 해소는 유리왕과 동년배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갈사후는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는 유명한 호동왕자이고, 둘째가 재사, 곧 신명왕입니다. 호동왕자가 자살한 후에 재사는 자중 자애하다가, 모본왕이 밀려난 후에 뭇 사람의 추대로 왕이 되었습니다.

김부식이 좀 혼동했고 박창화도 혼동했는데, 유리왕의 아들 중에 '재사'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 그 재사와 이 재사가 같은 사람이고 무휼의 아들입니다.

신명왕 재사의 재위기간은 그 아들 '태조왕 궁'의 재위기간에 합해졌는데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태조왕 - 부 신명왕 재사, 모 호화씨

호화씨는 갈사후의 남동생 옥문의 아들이니 곧 금와와 유화의 증손녀입니다.

신대왕 - 부 태조왕, 모 상씨

신대왕도 태조왕의 아들인데 동생으로 기록되었더군요. 그의 모 상씨는 귀족의 딸로 이 ㄸㅒ부터 상(尙)씨가 고구려의 유력성씨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산상왕 - 부 신대왕, 모 주(朱)씨

산상왕의 모 주씨도 유력귀족의 딸이었습니다.

동천왕 - 부 산상왕, 모 주통씨

산상왕이 주통촌 여자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있습니다.

중천왕 - 부 동천왕, 모 명림씨

중천왕의 모 명림씨는 신대왕을 옹립하고 좌원전투에서 승리하여 한왕조를 멸한 씨를 뿌린 명림답부의 손녀입니다.

서천왕 - 부 중천왕, 모 연(椽)씨

연씨는 주통씨와 같은 부족이니 주통씨의 일족인 거 같습니다.

돌고 - 부 서천왕, 모 불명

돌고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천한 여자였기에 기록에 안 남은 듯합니다.

미천왕 을불 - 부 돌고, 양부 서천왕, 모 을(乙)씨

을불대왕전에 나온 것처럼, 을불의 어미 을씨는 본래 서천왕의 후궁이었는데 돌고가 아버지의 첩과 통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을씨의 족보도 아주 개족보인데, 을씨의 조모는 동천왕의 모인 주통씨로, 을파소의 아들인 을 뭐시기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고, 그가 을씨의 아버지이니,

아주 간통으로 도배를 한 집안이라 하겠습니다.

고국원왕 사유 - 부 미천왕, 모 주(周)씨

주씨는 전에 말한 것처럼 오나라의 미주랑, 주유(周瑜) 공근의 5대손입니다.

이로 볼 때에 광개토호태왕의 족보에 들어가는 인물들 중 우리가 알 만한 인물로는, 금와, 해소(영포), 주통씨, 명림답부, 을파소, 주유 공근 등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광개토태왕의 족보 (2부)

결론만 말하자면, 드라마에서는 다르게 나오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담덕의 짝은 수지니가 아니라 기하입니다.

실제 역사가 그렇습니다. 다만 기하는 태왕사신기 작가가 그냥 임의로 설정한 이름이고,

실제 이름은 평양(平陽)으로, 소수림왕의 딸입니다. 즉 담덕에게는 사촌누나가 되는 셈입니다.

이 외에도 광개토태왕에게는 토산이라 부르는 정식 부인이 있었으나 별로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자세한 것은 전하지 않습니다.

박창화 고구려사략 영락대제(광개토태왕) 편:

◎ 元年申卯, 六月, 葬大行于<故國讓(羊角山)>, 禁殉葬及珍寶, 只置烟戶及碑以記功德. 以<天罡>爲皇太后, <吐山>爲皇后. 以<積>太子爲太輔, <淵億>左輔, <朋連>右輔. <免衡>中畏大夫, <琳>之庶子也. 其母, 以<免柯>女. 以<衡>爲<柯>孫. 上吊宮時, 累以義直諫. 至是, 擢以代<鞱>.

○ 원년{단기2724년/AD391}신묘, 6월 대행을 <고국양(양각산)>에 장사하였다. 따라 죽어 묻히는 것과 진물를 함께 묻지 말라고 하였으며, 단지 연호{烟戶}와 비석{碑}만을 세우고 공덕을 기록하라 하였다. <천강>을 황태후로, <토산>을 황후로 세우고, <적>태자를 태보로, <연억>을 좌보로, <붕련>을 우보로 삼았고, <면형>은 중외대부로 삼았는데, <림>의 서자였으며, 그의 어미는 <면가> 딸로서, <형>을 <가>의 손자로 삼았다. 상이 동궁으로 있을 때 여러 번 의로써 직간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발탁하여 <연도>를 대신하게 하였다

◎ 七月, <奈密>遣使弔賻, 請獻二女爲侍妾, 許之. 上謂群臣, 曰; "今, 四海諸國, 無不建元. 獨我國無此久矣. 宜體三代建元之例, 更建新元.? 於是, 命<春>太子上號, 乃以<永樂>爲年號, <平安>爲徽號. 上, 可之. 上謂太后, 曰; "<平陽>以<伯帝>之女, 事朕以貞. 今又生女, 而累勸其弟<岡>讓嗣于朕. 其功不少, 亦立爲后, 何如.? <天岡>曰; "天下事, 唯陛下主之. 老妾何知.? 上乃命<免衡>迎<平陽>于新宮, 冊皇后一如<吐山>例. <平陽> <獸林帝>元妃<燕>氏出也. 少好仙藥之事, 有窈窕之德而淨貞, 自守. 年過二紀, 未甞斜視一人. 上潛邸時, 以<平陽>爲宮人, 尋受幸生女. 至是, 又生女, 陞皇后, 寶算三十三. 后有聖德, 上每有大事, 必議而行之.

○ (광개토태왕 즉위년) 7월, <나밀>이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부의하고, 두 딸을 바치면서 시첩으로 삼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상이 군신들에게 이르길; "지금 사해의 여러 나라들은 연호를 세우지 않는 곳이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는 지가 오래되었소. 3대 시절{<추모>·<유리>·<대무>}의 건원의 예를 살펴서 응당 새 연호를 세워야 할 것이오"라 하면서, 이에 <춘>태자에게 명하였더니, 호를 지어 올리길, <영락>을 연호로, <평안>을 휘호로 하였고, 상이 그리 하자고 하였다.

상이 태후에게 아뢰길; "<평양{平陽}>은 <백제{伯帝}>의 딸이면서 짐을 섬김에 정숙하였었으며, 지금 다시 딸을 낳았고, 여러 번 자신의 동생 <강>에게 일러서 짐에게 사위를 양보하게 하였습니다. 그 공이 적지 않으니, 역시 후로 삼았으면 하온데, 어떠하십니까?"라 하니, <천강>이 아뢰길; "천하의 일은 오로지 폐하께서 주관하는 것이 온데, 어찌 노첩이 알겠습니까?"라 하였다. 상은 이에 <면형>에게 명하여, <평양>을 새 궁전으로 맞아들이도록 하여, 황후로 책봉하고 <토산>의 경우와 하나같게 하였다.

<평양>은 <수림제> 원비 <연>씨 소생인데, 젊어서는 선과 약물의 일을 즐겨하였고, 요조{窈窕}의 덕이 있었으며, 행실도 맑았고 절개를 지켜서, 나이가 24살을 넘도록 다른 이를 넘보지 않아 왔다. 상이 잠저시절에 <평양>을 궁인으로 삼아서 무척이나 아꼈더니 딸을 낳았었고, 이제 다시 딸을 낳고는 황후로 높아진 것이었다. 나이는 서른 셋 이었다. 후는 성덕이 있어 상은 큰 일이 있을 때 마다 꼭 의논하고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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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보면 광개토태왕은 서기 391년 17세에 즉위했다고 했고, 박창화의 책에도 소수림왕 4년, 즉 서기 374년에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평양 공주는 당시 33세였다고 나와 있으니, 광개토태왕보다 16세나 연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려면 매우 복잡한데 박창화 책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런 건 안 따지고 이상한 거나 연구하고 있습니다. 화백이고 벅수고 그따위 거 연구할 게 아니라 일단 왕의 족보부터 확실하게 챙겨 보는 게 중요한 것임다. 화백은 필요없는 사상이고 벅수는 박수무당이나 해야죠.

전에 중단했던 고국원왕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미천왕 을불이 주유의 자손인 주후를 얻었다는 것까지는 이야기하였고, 거기서 태어난 사유가 고국원왕이 되었는데,

고국원왕은 "선인" 해현의 딸 해씨에게서 구부, 이련을 낳았습니다. 해현은 주후에게 아첨하여 벼슬을 얻은 아주 교활하고 음란한 자로, 왕족인 고희의 딸과 간통하여 해씨를 낳았고, 고국원왕은 그녀에게서 구부, 이련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의 뒤를 이어 구부가 즉위했는데, 이가 소수림왕입니다. 소수림왕은 을불과 권력가문인 우씨 집안의 여자 사이에서 태어나 실권을 휘두르던 황숙 천원공 림의 딸인 천강과 혼인했습니다. 천강의 어미는 공신 우씨 집안 사람과 미천왕 을불의 어미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 천원공 림은 숙모와의 사이에서 천강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부터 좀 역사가 복잡해지는데,

구부의 동생 이련, 즉 고국양왕 (태왕사신기에서는 그냥 양왕) 은 , 이런 인간이었습니다.

◎ 三十一年辛酉, 正月, 以<于莘>女爲王子<伊蓮>妻, 賜新宮. <伊蓮>多通公卿妻女, 上命瓊部禁之, 而瓊叢大夫<仁>柔弱不能禁. <于莘>[女]時娠<伊蓮>子而不得爲妻, <莘>欲焚其女, 上聞之命納之. 三月, <高成>伐<北海>拓地千里, 置撫夷十二人. 祭鹿於<龍山>, 頒獸於王師<萬天>·<奉箕>·<封時>·<溫駝>等. 五月, <解蒙>薨, <杣>右輔. 巡五部, 勸農牧治水路. 十一月, <白龍院><陽隧>成.

○ 고국원왕 31년{단기2694년/AD361}신유, 정월, <우신>의 딸을 왕자 <이련>(양왕)의 처로 삼고, 새로운 궁전을 주었다. <이련>은 많은 공경들의 처나 딸들과 통정하고 있어서 상이 경부에 명하여 그를 막으라고 하였으나 경총대부 <인>이 유약하여 이를 금하지 못하였다. <우신>의 {딸이} <이련>의 아들을 가지게 되었는데 처로 삼아주지 않으니, <신>은 딸을 불태워 죽이려 하였고, 상이 이 소식을 듣고는 맞아들이게 하였던 것이었다.

양왕의 인품이 이러하였으나, 실제로 정치는 별로 하지 않고 술만 마시다 죽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 八年辛卯... 嗚呼, 上以仁明, 好德之姿, 精通物人之心, 而自幼好色沈酒, 無意於世. 政之大者委於<解克>, 細者委於<淵鞱>, 而使東宮監之. 至是, 中酒而棄民惜哉. 春秋四十九. 葬于故國襄(羊角山之東).

○ 양왕 8년{단기2724년/AD391}신묘, (전략) 슬프다, 상은 어질고 사리에 밝았으며, 덕행 하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었고, 세간의 인심에 정통하였었으나, 어릴 적부터 호색하고 술에 젖어 세상사에 뜻이 없었기에, 정사에 있어서 큰 일은 <해극>에게 맡기고, 작은 일은 <도연>에게 맡겼으며, 동궁을 시켜서 감독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술 마시다가 백성을 버렸으니 애석하였다 할 것이다. 춘추 49세였고, <고국양(양각산지동)>에 장사하였다.//

삼국사기에 광개토태왕은 양왕의 아들이라 나와 있으며,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이련이 소수림왕의 후인 천강후와 통하여 낳은 자식입니다. 광개토태왕이 평양공주를 일컬어 '백제'(伯帝)의 딸, 즉 큰아버지의 딸이라고 말했으니, 광개토태왕의 아버지는 양왕입니다.

소수림왕에게는 아들 강이 있었으나 양왕에게 양위하였고, 양왕의 아들인 담덕이 왕이 된 후에 담덕의 처가 된 평양 공주가 친동생인 강을 승려로 만들어 왕통계승에서 제외시켰습니다. 그리고 담덕이란 이름도 아도화상이 지어 줬다고 하는데, 솔직히 '담'(談) 자가 들어가면 크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골방에서 소근소근 거리는 느낌이 듭니다. 크게 이야기하려면 화(話)자를 썼어야지요.

연가려도 실제 인물이고 진짜 이름은 '연도' 입니다.

傳曰帝, 諱<談德>. 母, 太后<淵>氏, 號曰<天罡>上太后, <天原公><琳>女也. 夢與神鹿交好而生. 帝, 有而雄偉, 有大武之風. <獸林>命傳國, 故長子<岡>讓爲仙宗. 自幼好軍事, 讀兵書, 干預政事, <淵鞱>畏之.

전하여오길 제의 휘는 <담덕>이다. 모친은 <연>씨로서 <천강>상태후로 불렸으며, <천원공><림>의 딸이다. 꿈속에서 신록과 교호하여 낳았다한다. 제는 체격이 뛰어나게 듬직하였으며, 큰 무인의 기풍을 가졌었다. <수림>이 나라를 넘겨준다고 명하였기에, 장자이었던 <강>은 양보하고 선종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군대의 일을 좋아하였고 병서를 읽었으며, 정사에 간예하였더니 <연도>가 범접하지 못하였다.

연도가 왕위를 훔칠 마음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니 연가려가 연도입니다.

광개토태왕기나 고구려 역대 왕기를 보면 이미 선왕들은 죽었는데도 태후가 계속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들의 아비는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뭐 상상에 맡기기로 하지요.

다시 이 복잡한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미천왕 - 주후 --> 고국원왕

고국원왕 - 해현의 딸 해씨 -> 소수림왕, 고국양왕

소수림왕 - 연씨 -> 평양후

양왕 - 천강 -> 광개토태왕

광개토태왕 - 평양후 -> 거련 (장수왕)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장수 태왕의 양생법

박창화 고구려사략은 천 년이 지나도 정사로서는 인정받지 못할 겁니다. 도무지 그 책의 내용은 역사책에 절대로 낼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장수태왕의 양생법을 보니 역시 왕이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왕이기 때문에 무슨 짓이든 다 용서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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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年乙卯, 正月, <宝金>·<腆支>·<馮跋>等遣使來貢, 上接見于<鎭南{樓}>命<春>太子享之以配頒<東明曆>. 上與<三山>后如<溫湯> 禱子而還, 大閱于<汗>濱. 命<春>太子發勸農詔·設<籍蚕司>而示民. 二月, 與四后謁廟告卽位, 大赦國中及<貊>·<余>·<羅>·<倭>·<耶>等國. 三月, <魏>嗣遣使來朝. <宝金>與<倭>戰于<風島>, 克之. 五月, ...이하독해불능... 七月, 上如<朱留宮>道場, 與<春>太子論時事, <慕>·<超>·<凉>·<檀>皆淫逸亡. <春>太子曰;“淫者逸之始, 逸者虛之始, 虛者襲之始.” 上嘉之, 賜<春>太子妃<天乙>綵段五十匹·黃金百兩, 曰;“朕, 自東宮時, 見卿貞潔合於仙王之妃. 國之興亡係于宗女之貞與不貞耳.”<天乙>曰;“妾, 自幼受夫王之訓未嘗邪念. <吐>皇后亦然, 陛下鑑之.” 上曰;“知之.”**乃命<吐>后乞巧. <吐>后曰;“妾才鈍質薄, 雖乞何益.”上笑曰;“汝, 以主{絲}之婦不乞, 何{奵?}. <天乙>謬矣.”** <吐>后乃{伏}, 上抱入溫湯. <龍>后生子<獐>.
十月, <秦><姚{興}>送女<西平>于<魏>, 別鑄金人不伐以爲七八人{窮}送甚厚.

○ 장수태왕 2년{단기2748년/AD415}을묘, (전략)

7월, 상이 <주유궁>의 도장에 가서 <춘>태자와 당면한 정사를 논의 하였는데, <모{後燕}>·<초{南燕>·<량{後涼?}>·<단{南涼}> 모두는 음란함이 번져 망하였었다. <춘>태자 아뢰길; "음란하면 방종하게 되고, 방종하면 빈틈이 있게 되며, 빈틈이 있으면 적의 기습을 불러옴입니다."라 하였더니,

이 말에 상이 기뻐하여 <춘>태자비 <천을>에게 채단 50필과 황금 100근을 하고는, "짐이 동궁시절부터 지켜본바 경은 정결하시기가 선왕{仙王}의 비로서 합당하시었소. 나라의 흥망은 종실의 여인들이 정결한 가 정결하지 못한 가에 달려있음입니다."라 일렀더니,

<천을>이 아뢰길; "첩은 젊을 적부터 남편이신 왕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사특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토>황후께서도 그러하신 듯 하온데, 폐하께서 살펴보시지요."라 아뢰었다.

(저의 주: 춘 태자는 왕족으로 여러 '선도' 에 능했던 사람인 듯합니다. 토 황후는 광개토태왕의 버려진 본부인입니다.)

이에 상은 "알고 있습니다."라 답하고는, **<토>후에게 명하여 ?예쁜 모습을 보여 보라.?고 하였더니, <토>후는 “첩은 재주가 둔하고 본바탕도 박색인데, 항차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은 웃으면서 "당신은 실잣기를 맡아 본 아낙으로서 꾸미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리 예쁘시오? <천을>이 잘 못 보았음일 것이오.”라 하였더니,** <토>후가 넙죽 엎드렸고, 상은 이를 끌어안고 온탕으로 들어갔다. <천룡>후가 아들 <장>을 낳았다.


◎ 三年丙辰, 四月, <吐>后生女<織>.

○ 3년{단기2749년/AD416}병진, 4월, <토>후가 딸 <직>을 낳았다.

[토 왕후는 광개토태왕에게는 냉대를 받았는데 그 아들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는 뭐라고 해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이런 전력을 가진 장수태왕이 춘 태자에게 양생법을 묻는데,

◎ 上門於<春>太子, 曰;“先帝戒我以終身二后, 我已不能守矣. 天子之宮道果何如乎.” <春>太子曰;“天子, 異於臣民廣嗣養氣, 以萬民爲臣妾. 昔聖採供, 以次算以三千龍蝶, 而當夕短氣之. 主過勞而損祖宗. 宮制, 不一正. 后以下, 多則七八十人, 少不下三十余人矣.” 上曰;“無乃太過乎.” <春>太子曰;“專房則過矣. 補則無多數也.” 上曰;“<東明>三后, <光明>七后, <大武>五后. 朕欲取其中, 何如.” <春>太子曰;“聖矣.” 上曰;“補則幾人最可乎.” <春>曰;“七妃十六嬪二十八宮應天之宿矣.” 上曰;“好矣.” 上又問曰;“祖宗之法, 以龍交龍不取雜色, 近者頗多異議, 卿以爲何如.” 春曰;“<伏羲>以女<禍>爲后而生子二十人. <齊><桓>·<晋><文>皆用姊妹姑姪, 已有聖人之通法.” 上曰;“善. 朕亦以骨爲貴, 五后當用龍骨, 七妃龍四仙三, 十六嬪雜用, 何如.” <春>曰;“聖哉.” 上又問曰;“祖宗之法, 禁殉年少更復承寵, 情則然矣, 道似缺然, 奈何.” <春>太子曰;“聖主好生故天子無母, 况其餘乎.” 上, 黙然良久, 曰;“決矣.” 遂定五后七妃之制, 命中畏大夫<淵鞴>定其節次, 命瓊叢大夫<龍萱>選宗室女堪爲后妃者, 琳宗大夫<岡>選外戚女堪妃嬪者, 薦之. <龍>后生女<牝>.

○ 상이 <춘>태자에게 이르길; "선제께서 내게 평생 후를 둘만 두고 살라 하셨는데, 나는 이미 그 것을 지킬 수가 없이 되었습니다. 과연 천자의 궁중도리는 어떠한 것입니까?"라 하니,

<춘>태자가 아뢰길; "천자는 신하나 백성과 달라서 널리 후사를 두고 기운을 돋우며, 만민을 신하나 첩으로 둘 수 있습니다.

옛 성인은 시중드는 사람을 뽑아서 쓰길 헤아려보니 3천 용접이나 되었는데,

하룻저녁 짧게 냄새만 맡았습니다. 주상이 과로하면 조종이 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궁궐의 예법엔 정도가 하나만은 아니어서, 후 이하는 많으면 칠팔십 명이었고, 적어도 삼십 명은 되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의자왕도 대성인이셨군요. 그러니 해동증자께서 삼천궁녀를 얻는 것도 당연했나 봅니다. 옛 성인들은 性인들이셨나 봅니다)

상이 이르길; "{후 이하가} 아예 없거나 훨씬 많은 이는 없었단 말인가요?"라 하니,

<춘>태자가 아뢰길; "한 여인에게만 가는 것은 잘 못이어서, 보조하는 이를 두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라 답하였다.

[춘 태자나 고대의 우리 '제왕님들' 께서는 일부일처제를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상이 "<동명>께서는 세 명의 후를 두셨고, <광명>께서는 일곱 후를 두셨으며, <대무>께서는 다섯 후를 두셨는데, 짐도 이 들 숫자에서 택하려 하는데, 어찌함이 좋겠소?"라 물었고,

(동명 - 주몽. 광명 - 유리왕. 대무 - 대무신왕)

<춘>태자가 답하길; "훌륭한 생각이십니다."라 하였다.

상이 묻기를; "보조하는 이는 얼마까지 둘 수 있는 것인가요?"라 하니,

<춘>이 아뢰길; "7비 16빈 28궁을 두시면 하늘의 성수에 맞을 것입니다."라 하였고,

상은 "좋아 보입니다."라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조종의 법도에 용골은 용골과 교접해야 하며 잡색은 취하지 않는다 하나, 근자엔 다른 의견들도 파다한데, 경의 의견은 어떠하시오?"라 하니,

(즉 왕족은 거룩하니 자기는 근친상간을 해야 겠다는 말입니다)

<춘>이 답하길; "<복희>는 자신의 딸 <화>를 후로 삼아서 자식을 스물이나 두었으며,

[복희씨도 별 수 없군요]

<제>의 <환>{공}과 <진>의 <문>{공}은 모두 자매 또는 고모{또는, 이모} 및 조카와 혼인하였으니,

이미 성인들의 통상적인 법도가 되었습니다."라 하였더니,

상은 "옳거니! 짐도 또한 골육을 귀하게 할 것이며,

다섯 후를 용골로 하고,

(용골 = 왕족, 성골)

일곱 비는 네 명의 용골과 세 명의 선골로 하고,

(선골 = 진골과 비슷한 의미인 거 같음)

열여섯 빈은 잡색으로 하였으면 하오. 어찌 생각하시오."라 하니,

<춘>은 "훌륭한 생각이십니다."라 하였다.

상이 또한 묻기를; "조종법도가 젊은 나이에는 순사하지 못하게 하고 다시금 이어서 총애를 받게 하였는바,

정리 상으론 그러할지라도 법도 상으론 흠결이 있어 보이는데, 어찌 생각하시오?"라 하니,

<춘>태자가 아뢰길; "지존이신 주상님들은 살리길 즐겨하시며,

천자는 어미도 따지지 않는데, 항차 그 나머지야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라 하니,

상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는 "결정하였소."라 하고는, 5후 7비를 제도로 정하고는, 중외대부 <연비>에게 명하여 그 절차를 정하라 명하였으며, 경총대부 <용훤>에게는 후비로 합당한 종실의 여인들을 선발하고 림종대부 <강>은 외척들 중에서 비빈으로 합당한 여인들을 천거하라 명하였다. <천룡>후가 딸 <빈>을 낳았다.

◎ 四月, 上親選後宮三十人於瓊·琳薦姬中, 納于後宮, 定殿房僚屬. 上所選多是, 腆厚豊秀之嬪, 而巧娟者少矣. **上謂<春>太子, 曰;**“所難行在乎, 克己. 朕年方壯, 易於使氣, 自可難制國之大事, 唯信於叔父三人. 朕若犯過, 無憚直諫, 可也. 叔妻<天乙>·<胥>妻<天龍>皆非薦中, 而自願當之, 非敢選也. 有欲接乎, 至人求其方弗也. 抑亦不能克己之慾歟.” <春>太子曰;“臣與<胥狗>爲陛下之股肱, 安得不供乎. 實是率先垂範也.” 上嘉其言, 遂后二妃.**
太后生子<談太>, 以<龍德>妻<胡連>爲乳母, <龍德>爲育成大夫.
十月, <訥祇>遣<宝海>入貢, 言<美海>亦自<倭>歸<羅>, 亦大豊, 云.

○ 4월, 상이 손수 후궁 30인을 경총대부와 림종대부가 천거한 여인들 중에서 선택하여, 후궁으로 들이고, 궁전과 방을 정하여 주고 각자에 딸리는 관원도 정하여주었다.

상이 친히 이리 많은 이들을 골랐기에 착하고 후덕하며 훤칠하고 고상해 보이는 빈들이 많았고, 교태 있고 예쁜이는 적었다.

**상이 <춘>태자에게 이르길; "어찌해야 할 지 어려운 일이 있게 되어도 참아내겠지만, 짐의 나이가 피가 끓는 때인지라 기분 내키는 대로 하기가 쉬워서 나라의 큰일들을 혼자서 다스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로지 숙부 세 분만을 믿을 것입니다. 짐이 과함을 범하거든 기탄없이 직간하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숙부의 처 <천을>과 <서구>의 처 <천룡> 모두가 천거된 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던 것은 제가 그래야 된다고 원하였기에 감히 뽑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접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 방도를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억누르겠지만 자신의 욕정을 이겨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요!"라 하였더니,

<춘>태자가 아뢰길; "신과 <서구>는 폐하의 팔다리 같은 신하인데도 감히 하나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실상 이리되어야 솔선수범하는 것이옵니다."라 하였다. 상은 그 말이 가상하여, 두 비{<춘>태자의 <천을>비와 <서구>의 <천룡>비}를 후로 올렸다.**

(춘 태자와 서구는 왕이 원하는 대로 아내를 바칩니다. 금나라 황제들 중 가장 명군이며 발해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완안량 황제께서도 그리 명하셨지요. 후대인들은 완안량을 폭군이라고 매도했지만, 완안량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풍습을 부활시켰을 뿐이군요.)


(중략) 10월, <눌기>가 <보해>를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는 말하길, <미해> 역시 <왜>에서 <신라>로 돌아왔고, 또한 대풍이 들었다고도 하였다.

[눌기는 신라 눌지왕인데, 보금(실성왕) 을 죽이고 그 아내인 광개토태왕의 딸과 간통한 사실이 나와 있네요. 보해, 미해 다 고구려와 왜에서 잘 놀았는데, 박제상만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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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니 도력이니 성인이니 정체를 알고 보니 허탈해지기만 합니다.

아주 궁금했던거가 실마리가 잡히네요. 고구려를 상징하는 걸로 井 이 왜일까? 도대체 알수 없었는데 을불대왕전 등 몇편의 글을 보니 짐작이 갑니다. 지금 세상은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지만 고대 세계는 씨를 뿌리는 행위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했던거 같습니다. 고구리 백제 신라 그외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나라던간에 왕족들끼리 피가 얼마나 얽혔는가에 따라 관계가 정해졌을테고, 이 井이란 글자는 짐작하는대로 구멍입니다. '고귀한'씨를 퍼뜨리는데 특화된 기능과 목적을 가진 연합체가 고구려였던게 아닐까요? 그리고 이조시대에 들어와서 아주 적극적으로 고대역사서를 모아서 없앤 이유가.... 07.10.19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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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하 야한글을 못보게 하려고..유교가 세상의 도리가 되었는데 저런 역사서가 돌아댕기면 대략 난감하죠. 이조시대에 '반민족적(?)'인 분서갱유를 한 이유를 캐려고 거창한 논리를 동원해서 궁리들을 하는데 지배층의 생각은 아주 단순한데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민족은 아주 애매한 개념인데 고구려때 겨레라 함은 같은 씨, 같은 피를 얼마나 나누었는지에 따라 정해졌을거라 확신합니다. 울타리안에 같이 거주한다고 萬民을 나의 겨레라고 했을리가 없습니다. 자본주의에서 돈으로 사람을 사듯이 내 씨를 뿌려서 사람과 영토를 얻는 방식이 아니었을까요? 07.10.19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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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을소냐"며 반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그렇다면...전에는 따로 있었나봅니다. 어쩌면 고대엔 선천적으로 차별이 있는 인간종족들이 존재했었는지도 모릅니다(학문적으로는 타종족을 같은 인간으로 안보기 때문이라고 점잖게 말하지만서두)그래서 선택받은 자들이 '고귀한'씨를 널리 뿌리는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그게 바로 홍익인간이었는지도...그렇게 열씨미 과업을 수행한 덕분에 이제는 張三李四라 할지라도 인간 꼴을 갖추고 살수 있게 된겁니다. 07.10.19 06:49
답글



윗글에 "7비 16빈 28궁을 둬서 하늘의 성수에 맞춘다" 이런류의 대화가 나오는데 오늘날 개념으로 하자면 세계 경영, 국제 기준 이런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욕정과 이기심 같은게 기본으로 깔려있지만 무조건 비난하고 실망할 꺼리가 아니란 겁니다. 구약 이야기에도 근친상간과 난교가 자주 나옵니다. 상황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른 겁니다. 고구려의 상징인 井, 이거 아주 핵심입니다. 신라의 원화, 화랑도 마찬가지 역할이었습니다... 많은 의문들이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이 잡히는군요.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07.10.19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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