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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서문

라무네 종교tv 2017. 8. 5. 01:06


정인지서문

 

훈민정음서문과 최만리상소문에 이어 마지막으로 정인지서문을 해석해보자.

 

사람들은 나름대로 안간힘을 써서 정인지서문을 해석하지만, 그 해석에 있어 무엇인가가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 이른바 학자라는 이들이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는, 최만리상소문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만리상소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서 정인지서문을 해석하려 하는 짓은 헛고생일 뿐이다. 왜냐하면 정인지서문은 최만리상소문에 대한 반론이기 때문이다. 훈민정음과 세종에 대한 찬양이 정인지서문의 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최만리상소문에 대한 반론이 그 목적이다. 생각이 얕은 사람에게는 정인지서문이 쉽게 해석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최만리상소문 보다 더 어렵다.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동방의 세계관이나 정치 체계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특히, 첫 문장은 문자에 대한 고찰이 있어야 해석이 가능하다. , 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제대로 알고 중국어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야, 최만리상소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고, 정인지서문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식민사학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강단사학과 식민사학의 굴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민족사학, 역사를 다루는 모든 사람들이 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모르고 있고, 문자 즉 중국어의 정체에 대한 고찰을 전혀 못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속 시원하게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해석해 놓은 것을 구경할 수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학자라는 사람들은 정인지서문이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서, 잘 이해하고 있는 척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 그리하여, 동국사를 왜곡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류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 이에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해석하여, 동국사 복원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행복과 번영에 조금이나마 이바지하고자 한다. 진심으로, 진실이 거짓을 몰아내어 인류가 밝아지기를 바란다.

 

진실은, 동국은 동방의 바티칸이며, 동방의 공용어인 문자는 자연어가 아닌 인공어라는 사실이다. 자연어인 중국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낸 글자를 가리켜 문자(文字)라 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 즉 한자는 중국의 자연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들어낸 글자가 아니다. 현재의 중국어는 자연어가 아닌 인공어로서 문자이고, 중국의 원래 자연어는 방언이라 한다. , 동국의 자연어는 리어이고 중국의 자연어는 방언이며, 동방의 공용어는 문자 즉 현재의 중국어이다. 또한, 자연어인 리어와 방언은 같은 언어(諺語)이지만, 동국과 중국을 구별하는 전통에 의해 다르게 불리는 것뿐이다. 동주(東周) 이후로 동국은 동방의 바티칸이지만, 그 이전에는 천하의 바티칸이었다. 이것이 진실이다.

 

정인지서문을 자세히 살피기 전에, 개괄하여 이해를 돕는다. 정인지의 후서(後序)는 세종의 훈민정음서문과 그 내용이 다르다. 세종의 서문은 한자음 표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으나, 정인지의 서문은 한자음 표기를 비롯하여 모두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한자음 표기법으로써 훈민정음을 사용하는 것, 공문서에 이두 대신 훈민정음을 사용하는 것, 한문서적을 언어(諺語)로 풀이하여 훈민정음으로 표기하는 언해(諺解) 등이다. 그리고, 훈민정음 28자는 언문 27자에 여린히읗을 추가하여 만든 것을 말한다. 또한, 훈민정음이 반포된 곳은 중국으로서, 훈민정음이 사용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이다.

 

최만리상소문과 그 후기(後記)를 살펴보면, 세종은 언문을 이용하여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려 하였고, 옥사 등의 공문서에 이두 대신 언문을 사용하려 하였고, 삼강행실 등의 한문 서적을 언해하여 널리 보급하려 하였다.

 

그러한 세종의 뜻에 반대하여 최만리 등 7명은 상소를 하였는데, (1)한자의 음을 언문으로 표기하는 언문운서는 한자의 음을 바꾸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였고, (2)중국이 한문과 언문을 함께 사용하여 동문동궤를 어기는 것은, 여러 문자를 사용하는 오랑캐처럼 중국의 문명을 망치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였고, (3)비록 이두라 하여도, 이두는 한자를 사용하므로 학문에 도움이 되는데, 잘 쓰고 있는 이두를 폐기하고 한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언문을 사용하는 것은 문화(右文之化)를 망치는 것이라 하여 반대하였고, (4)옥사에 언문을 사용하더라도 억울함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여 반대하였다. 그리고, (5)언해에 대한 얘기를 상소문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이에 정인지서문이 반론하기를, (1)훈민정음으로 음을 표기한 한자의 모양과 음은 고전을 모방하였기에 바뀐 것이 없고, (2)한자의 음은 바꿀 수 없어 외국도 중국의 자음을 그대로 써야 하지만, 풍토와 성기(聲氣)가 다른 외국의 어음을 중국의 자음으로 표기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고, 모두 각자의 처지에 따라 여러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꼭 동문동궤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중국도 한문과 훈민정음을 함께 사용할 수 있다고 반론한다. (3)동방의 어음을 표기하는 이두가 오랫동안 관부와 민간에서 사용되었지만 가짜 음을 사용하기에 껄끄럽거나 막힘이 있고, 또한 비어와 루어라서 이미 논할 바가 아니고, 음성언어로 사용할 때에는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두를 훈민정음으로 대체한다고 말한다. (4)화하 때처럼 어음을 표기하는 문자가 없어서,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이 한문 문서로는 그 사정을 알기 어려웠으나, 훈민정음으로 옥사를 다스리면 그 사정을 알 수 있게 되고, (5)한문으로 된 서책을 배우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알기 어려웠으나, 훈민정음으로 언해하면 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반론하고 있다.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사람들은 언문과 훈민정음이, 한국어와 한글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정확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하려고 하면 정확히 구별할 수 있겠으나,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구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분명히 그들은 서로 전혀 다르다. ‘알파벳은 영어를 표기하는 문자라고 말하면 잘못이듯, 영어를 표기하는 알파벳과 독일어를 표기하는 알파벳이 서로 전혀 다르듯, 동국의 리어를 표기하던 언문 27자와 한자의 발음과 방언을 표기하는 훈민정음 28자는 서로 전혀 다르다. 그러나, 언문 27자에 여린히읗을 추가하여 28자로 만든 것이 훈민정음이므로, 언문과 훈민정음은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도 엄격한 구별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우리말(俚語) 표기에 사용된 적이 없다. 우리말 표기에 사용된 것은 언문으로써 지금의 한글이다. 훈민정음은 지금의 한글과 관계가 없고, 우리말이 아닌 중국말(方言) 표기에 사용되었을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필자의 잘못을 바로 잡는다. 훈민정음서문과 최만리상소문을 해석하고 정인지서문을 개설(槪說)한 이후로 5년 동안, 국어사전 등을 근거로 훈민정음의 정음한자의 바른 음으로만 해석하였는데, 오늘 정인지서문을 자세히 해석하는 것을 계기로 정음에 대한 고찰을 하였고, 그동안 필자가 주장했던 정음의 해석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에, 잘못을 바로 잡는다.

 

자연적인 소리는 성()이고 의미를 갖는 인위적인 소리()는 음()인데, 의미를 갖지 않는 인위적인 소리도 성()이라 한다. 그리고, 자연적인 무늬는 문()이고 을 붙인 것을 자()라 하고, 을 붙인 것을 운()이라 한다. 그리하여, 문자언어이자 음성언어인 文字가 탄생한 것이고, 또는 字音은 한자의 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 문자(漢字=현 중국어)字韻으로서 자연어가 아닌 인공어이다. 마찬가지로, 자연어로서 말(, 諺語)의 음()을 가리켜 어음(語音)이라 한다. 그러나, 동방의 옛날 사람들은 문자를 공용어로 채택하였고 언어(諺語)는 내버려 두었다. 그래서, 역대 동국과 중국의 치자는 여러 운서를 꾸준히 발간하여 문자로써 음성언어를 통일하려 하였다. 세종도 역시 문자의 통일을 위하여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사성통고 등을 발간하였다. 그리하여, 최근까지 正音은 곧 한자의 바른 음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언어(諺語)의 통일 까지는 아닐지라도, 자연어인 방언과 리어의 표기를 위해 훈민정음을 사용하려 하였다. , 훈민정음의 정음은 에 대하여 <字音語音을 바르게 표기할 수 있는> 글자를 뜻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냥 정음이라 하였을 때에는 한자의 바른 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정음이라 하였을 때에는 인위적인 모든 음의 바른 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말 그대로 표음문자를 뜻한다. 당시에도 지금처럼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개념이 있었는지, 둘을 서로 어떻게 구분했는지 알 수 없으나, 훈민정음이라는 단어는 표음문자라는 단어와 같다 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것만을 훈민정음이라 하였고, 이두 대신 사용하는 것과 한문서적을 언해하여 표기하는 것은 언문이라 하였었다. 언문을 이용하여 세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고, 그 중에 하나의 목적이 훈민정음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틀렸다.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것과 이두 대신 사용하는 것과 한문서적을 언해하는 것, 모두 다 훈민정음이 맞다. 세종은 동국의 언문을 이용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그 훈민정음을 세 가지 용도로 사용하였다. , 훈민정음은 애초부터 다목적으로 창제(創制)된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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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13, 세종 28929일 갑오 4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 {출처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禮曹判書鄭麟趾序曰: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蓋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之字, 以通其用, 是猶柄鑿之鉏鋙也, 豈能達而無礙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吾東方禮樂文物, 侔擬華夏, 但方言俚語, 不與之同,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昔新羅 薛聰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 莫不該括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故智者不崇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以是解書, 可以知其義; 以是聽訟, 可以得其情字韻則淸濁之能卞,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唳雞鳴狗吠, 皆可得而書矣遂命詳加解釋, 以喩諸人於是, 臣與集賢殿應敎崔恒副校理朴彭年申叔舟修撰成三問敦寧注簿姜希顔行集賢殿副修撰李塏李善老等謹作諸解及例, 以敍其梗槪, 庶使觀者不師而自悟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恭惟我殿下天縱之聖, 制度施爲, 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而非人爲之私也?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蓋有待於今日也歟!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을 통하여서, 삼재(三才)128) 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風土)가 구별되매 성기(聲氣)도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대개 외국(外國)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그 일용(日用)에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어찌 능히 통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요는 모두 각기 처지(處地)에 따라 편안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중국에 견주되었으나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만이 같지 않으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지취(旨趣)의 이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은 칠조(七調)129) 에 합하여 삼극(三極)130) 의 뜻과 이기(二氣)131) 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사용하여 구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 등이 능히 발휘할 수 없는 바이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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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서문을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먼저 최만리상소문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인지서문을 해석하기 전에 최만리 상소문의 내용을 정리해보겠다.

 

해례본이 있기 2년 전, 세종과 정인지 등은 상소문을 올린 최만리 등과의 논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훈민정음으로 펼친 세 가지 언문정책은 논리가 아닌 임금의 권위로 강행된 것이다. 최만리의 논리에도 분명히 구멍이 있었지만 세종 측에서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였고, 논쟁에서는 졌다. 그래서, 2년 후에 정인지서문을 통하여 최만리상소문에 대해 반론하고 있는 것이다. 정인지서문에서 최만리상소문에 반박하고 있지만, 역시나 마찬가지이다. 최만리의 논리에 반박하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최만리가 주장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한 것일까? 최만리상소문이 말하고 있는 바는 대체 무엇일까?

 

그 때나 지금이나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 한글전용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요즘이나 당시의 최만리나,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를 모르고 있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를 알면 쉽게 해결될 일을, 그 차이를 모르고 있어서, 동문동궤를 내세우고 한글전용론을 내세우는 것이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는 글자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그 기능은 서로 다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글자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그 기능이 전혀 다른데, 동문동궤를 내세워서 언문을 반대하는 것이나, 장점을 내세워서 한글전용을 주장하는 것이나, 모두 잘못된 논리이다.

 

승용차가 있다고 해서 오토바이를 없애야 할까, 오토바이가 있다고 해서 자전거를 없애야 할까? 승용차나 오토바이나 자전거나, 모두 승용을 위한 도구이다. 그리고,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로 변화한 것이, 승용차가 오토바이 보다는, 더 발전된 형태라 할 것이다. 그러나, 승용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그 기능이 서로 전혀 다르다. 오토바이는 승용차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고, 자전거 역시 오토바이의 단점을 보완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첨단의 승용차가 자꾸 발명되어도 오토바이는 계속 쓰이는 것이고, 가지 못하는 곳이 없는 오토바이가 있지만 자전거도 계속 쓰이는 것이다. 이것이 저것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 오토바이는 승용차가 지나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있고, 자전거는 승용차나 오토바이와는 달리 간단히 인력으로 움직인다. 현실적으로 전혀 불가능해 보이지만, 만약 승용차가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하는 역할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승용차 전용론을 내세워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완전히 폐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도 그러한 관계에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기능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뜻을 전하는 언어(문자언어)라는 공통점이 있을 뿐, 뜻을 전하는 방법이 전혀 다르다. 표음문자는 뜻을 그대로 전하고, 표의문자는 뜻을 압축시켜서 전한다. 상황에 따라서 뜻을 압축시키는 일이 더 유리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반드시 필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표음문자는 비교적 쉽게 익히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표의문자는 숙달되면 표음문자 보다 전달 속도가 매우 빠르다. 실제로 중국인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한국어는 현 중국어의 말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글씨로 표기할 때나 통신기기에 입력할 때는, 표음문자인 한글이 표의문자인 한문 보다 더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음성언어로 표현할 때에는 표의문자인 중국어의 빠르기가 매우 탁월하다. 중국어로 주마간산이라고 4 음절로 말하면 되는 것을, 한국어로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산을 보다라고 11 음절로 말하여야 한다. 이것이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깜박하고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글자가 말을 완전히 대체하여 말이 사라지는 일이 없듯이, 표음문자가 표의문자를 또는 표의문자가 표음문자를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 ‘어려운 한자를 꼭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표음문자가 잘 발달되고 널리 사용되더라도 표의문자는 나름대로 반드시 그 쓰임새가 있다는 뜻이다. ‘어려운 표의문자를 대신하여 쉬운 표의문자를 개발하는 것이 문제이지, 표의문자 그 자체가 문제시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한글과 한자 둘 다 표음문자라면 한글전용론을 주장해도 된다. 그러나, 한글은 표음문자이고 한자는 표의문자이다. 둘은 그 기능이 서로 다르다. 기능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한글이 한자를 완전히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한자를 쓰는 것이 못마땅하면 다른 표의문자를 개발해야만 한다. 미래에 표의와 표음을 동시에 행할 수 있는 글자가 발명된다면 모르겠으나, 현재까지 인류는 표의문자와 표음문자 두 가지를 동시에 함께 써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한글을 쉽게 익히고 잘 사용하여 뜻을 전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음에도, 이모티콘이 유행하고 있다. 이러한 일은 한 때의 유행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이모티콘은 일종의 표의문자이다. ,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는 수많은 기호나 상징도 표의문자에 속한다. 다만, 한자는 이를 정치적으로 극대화 시킨 것이다. 이처럼 앞으로도 표의문자가 사라지는 날은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글과 한자를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로 나눌 수도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 때, 왜 훈민정문이나 훈민정자가 아니고 훈민정음인지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한글의 목적이 자신의 뜻을 상대방에게 한글이라는 문자로써 전달하는 것이므로, 한글을 문자언어로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한글의 창제 목적 중 하나는, 한자의 음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게 하여 한자가 음성언어로써 잘 작동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므로, 이 때의 한글은 문자언어의 기능이 아닌 음성언어의 기능을 한다. 또한, 자기의 뜻이 담긴 자연어를 그 음성으로 표기하여 상대방에게 전하고, 상대방은 자연어의 음성을 비록 청각이 아닌 시각으로 인지하지만, 음성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훈민정음이라 하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최만리상소문이 주장하는 바를 알아보자. 최만리의 주장이 옳든 정인지의 주장이 옳든, 최만리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그에 반론하는 정인지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상소문은 6개항을 주장하고 있는데, 각 항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상소문 전체에서 최만리가 주장하는 바는, 세종의 언문정책이 옛것과 사대모화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옛것에 위배된다는 것은, 오랜 세월을 흐르면서 안정이 된 관습이나 제도 등에 어긋난다는 것을 말한다. 사대모화에 위배된다는 것은, 문명을 이루도록 힘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옛것에 충실한 것은 사대모화에 힘쓰는 것이고, 문명을 이루기 위함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옛것을 어기는 것은 안정된 문명을 어지럽히는 일로서, 사대모화에 위배되는 것이다. 사대모화는 동국이 중국을 키우는 것을 말하는데, 동국이 동국으로서 존재하는 이유이다. ,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기자의 유풍이다. 그 기자의 유풍 중에 하나가 바로 동문동궤이다.

 

1항은, 언문을 운서의 발음기호로 사용하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만든 언문운서에서는 한자의 발음 등이 달라진다. 옛것이 아닌 새로운 언문운서를 중국에 내려 보내서, 혹시라도 반대하는 중국인이 생긴다면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다.

 

2항은, 언문을 사용하게 되면 한문과 언문 두 가지의 문자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되어, 하나의 문자만을 사용하는 원칙인 동문동궤에 어긋난다. 이는 여러 문자를 사용하는 외국의 오랑캐와 다를 바가 없어서, 중국 문명을 망치는 행위이다.

 

3항은, 언문을 이두 대신 공문서에 사용하게 되면 한문의 쓰임이 퇴보하여, 한문으로 이루어진 문명이 사라진다. , 문명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사방으로 퍼지도록 하는 것이 맞는데, 특정 지역의 문자를 인위적으로 중국에 퍼뜨리는 것은 잘못이다.

 

4항은, 옛날부터 중국은 말과 글의 내용이 서로 일치해도 억울한 옥사가 많았는데, 억울한 옥사는 말과 글의 내용이 서로 달라서가 아니라, 옥리가 어찌 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따라서, 옥사의 공문서에 이두 대신 언문을 사용하더라도 아무 이익이 없다.

 

5항은, 언문은 중국의 풍습을 크게 바꾸는 일이므로, 언문을 시행하더라도 신중하게 하여야 하는데, 너무 급하게 처리한다.

 

6항은, 언문이 유익하다 하더라도 동궁은 학문에 전념하여야 하는데, 동궁까지 나서서 언문에 매달리는 것은 옳지 않다.

 

정인지서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은 상소문에 대한 반론이자 언문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부분이고, 뒷부분은 훈민정음과 세종에 대한 찬양이다. , 앞부분은 상소문에 대한 반론으로서 왜 훈민정음이 필요한가를 말하고 있고, 뒷부분은 앞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훈민정음, 그 훈민정음에 대한 자랑과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에 대한 찬양이 현학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정인지서문은 앞부분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하여야, 훈민정음의 정체나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앞부분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정인지서문은 상소문의 5항과 6항이 절차적인 문제라서 그러한지, 사소한 문제라고 여겨서인지 다루지 않고 있다. 반면에, 나머지 네 개항에 대해서 반론하고 있다. 상소문의 네 개항을 간단히 정리하면, 세종의 언문정책이 한자의 음을 바꾸기 때문에, 중국을 오랑캐처럼 두 가지 이상의 문자를 사용하는 나라로 만들기 때문에, 이두를 폐기하여 문자를 퇴보시키기 때문에, 옥사의 억울함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반대하는 명분의 저변에는 기자유풍이 원칙으로 자리해 있는데, 동문동궤는 그 중에 하나이다.

 

앞부분은 상소문에 대한 반론으로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 번째는, 고인이 정해 놓은 자음(字音, 漢字)이라 외국의 모든 나라가 중국의 자음을 사용해야 옳지만, 외국은 각 지역의 어음에 맞는 자음 즉 새 문자를 따로 가지는 것이 좋지, 중국의 자음을 강요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상의 문자를 사용하는 외국을 빗대어, 중국도 처지에 따라 두 가지의 문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 동문동궤에 의해 중국의 구주지내는 하나의 문자만을 써야 하므로, 동문동궤를 위반하는 행위를 직접 거론할 수 없으므로, 중국이 두 가지 문자를 사용해도 된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방언과 리어를 표기하지 못하는 문제로 인해 학서자와 치옥자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어서,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이두의 단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의 음이 바뀌었다는 최만리의 지적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이 없고, 오히려 뒷부분에서 음이 바뀌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한자의 음이 바뀐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그렇지 않다고, 동문동궤를 어긴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처지에 따라 행하야 한다고, 이두를 폐기하면 안 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이두에 문제가 많다고, 옥사의 억울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옥사의 어려움을 해결하면 억울함도 해결될 수 있다고, 반론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정인지서문을 해석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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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蓋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之字, 以通其用, 是猶柄鑿之鉏鋙也, 豈能達而無礙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을 통하여서, 삼재(三才)128) 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風土)가 구별되매 성기(聲氣)도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대개 외국(外國)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그 일용(日用)에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어찌 능히 통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요는 모두 각기 처지(處地)에 따라 편안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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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한문(漢文)과 한자(漢字)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 하지만,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현재의 우리는 이자동의(異字同意, 一義數文)를 잘 구별하지 못하지만, 각 글자는 엄연히 서로 다르다. 여기의 , 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는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천지자연의 무늬()가 있다고 하였는데, 뒤에서는 소리()에 따라 글자()가 아닌 글자()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언뜻 보면, 천지자연에 이 있으니, 에 따라 을 만들었다라고 말해야 대구(對句)가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인지 정도 되는 인물이 를 구별하지 못하고, 을 써야 할 곳에 를 썼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 실록의 기록자가 실수하여 로 오기한 것일까? 그러나, 천지자연에 이 있고 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고인이 에 따라 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천지자연에 이 존재하는데, 에 따라 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원문에 있는 대로 에 따라 를 만들었다가 맞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분명히 는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는 모양이 아닌 소리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天地自然(천지자연)이란 곧 사물(事物)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물은 일과 물체를 통틀어서 말하는데 곧 우주만물(삼라만상)을 말함이다. 그 사물에 소리()가 있다는 것은 그 사물의 고유한 특성(特性)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 소리()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멍멍, 컹컹, 왈왈 등이라 답하는 것은 정말로 무식한 답변이 될 수 있다. 만약 개()의 소리가 멍멍이라면, ()의 소리는 무엇이라 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나무()의 소리는 무엇인가, ()의 소리는 무엇인가, 잠자다()의 소리는 무엇인가, 나다()의 소리는 무엇인가? 나무의 소리를 쑥쑥(자라다)’이라고 할 것인가, 물의 소리를 졸졸(흐르다)’이라고 할 것인가, 잠자다의 소리를 쿨쿨(자다)’이라고 할 것인가, 나다의 소리를 (튀어 나오다)’이라고 할 것인가? , 사물에 소리가 있다는 것은 귀로 듣는 청각적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리에 따라 만든 글자(), ()의 소리는 견이고, 나무의 소리는 목이고, 물의 소리는 수이고, 잠자다의 소리는 면이고, 나다의 소리는 생이 된다.

 

참고로 말하자면, 혹자는 有天地自然之聲則必有天地自然之文천지자연의 이치에 맞는 소리가 있으면 ~’으로 번역하는데, 그렇게 번역하거나 해석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필자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원문에 명확하게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有 天地自然之 聲)’이라고 나와 있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이치에 맞는~’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옛 사람들의 생각은 이러하다. 사람에게는 오감이 있다. 그 오감 중에 시각과 청각이 사물을 곧바로 인지하는 방법이다. 사물은 시각과 청각으로 인지될 수 있게 각기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사물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 바로 소리()와 무늬()이다. 그 사물의 무늬()를 그대로 종이에 옮긴 것이 (象形, 모양) 즉 한문(漢文)이고, 사물의 소리()를 그대로 입으로 발음한 것이 (소리) 즉 한자(漢字)이다. , 는 바로 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한문(漢文)의 발음을 字音이라 하지 않고 또는 이라고만 말하여도 되지만, ‘역전앞과 같은 말버릇에 의해 자음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훈민정음과 관련한 여러 고전에 등장하는 文字라는 단어는 바로 象形而字(상형과 자, 모양과 소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를 함께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正音은 사람의 입으로 내는 한자의 바른 음을 가리키는 단어이고, 正聲은 악기로 내는 (아악)의 바른 성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한문 또는 한자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만, 옛날에는 그냥 문자라 하였다. 굳이 문과 자를 구별하게 되면, 문은 모양 즉 뜻을 가리키고, 자는 소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예를 들면, 설문해자(說文解字)은 글자의 모양에 따라 뜻을 설명한다는 말이고, 는 글자의 소리를 발음할 수 있게 풀이한다는 말이다.

 

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여러 말들이 있지만, 강희자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적어도 여기 정인지서문에서는, 문과 자를 이러한 뜻으로 해석해야 문맥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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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今通論] 倉頡造書, 形立謂之文, 聲具謂之字

[고금통론에서 말하길] 창힐이 글을 만들었는데, 모양이 선 것을 이르러 문()이라 하고, 소리가 갖춰진 것을 이르러 자()라 한다.

{출처 : 康熙字典, 文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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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倉頡之初作書也 蓋依類象形 故謂之文 其後形聲相益 卽謂之字 (文者 物象之本) 字者 言孶乳而寖多也 著於竹帛 謂之書 書者如也~

~창힐이 처음 서를 만들었다. 대체로 상형에 의류하였기 때문에 문이라 한다. 그 후 형과 성을 서로 더하였는데 곧 자라 한다. (문이란 물상의 본이고) 자란 말이 자유해서 점차 많아진 것이다. 죽간과 비단에 써진 것을 서라 하는데, 서는 자와 같다.~

{출처 : 說文解字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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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경사편1경전류2/소학자서(字書);자서(字書)의 글자 수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8)>와 설문해자서를 비롯한 여러 고전을 참고하여 정리하면, 결국에는 가 같은 것이므로, 창힐이 처음 서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 이전까지는 문이라 하고, 진나라 이후 특히 한나라 이후에는 문에 소리를 붙여서 자라 하였다. 그리고, 자로써 죽간이나 비단에 기록한 문장을 서라 하였다. 그러나, 자라 부르기 이전에 명()이라 하였기에, 명과 자는 같은 것이다. , 명은 문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서, 각 글자를 부르기 위한 호칭이며, 이를 후대에 자라 하였으며, 지금에 (고려, 조선에) 이르러서는 운()으로 변했다. 결국, 자가 바로 운이고 운이 바로 자가 되는 것이다(=字音==字韻).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자음과 자운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원래 문은 어음으로 읽었으며 자음이 없었는데, 문에 이름을 붙여, 명 즉 자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 상형에 따라 만든 글자인 문은 그 수가 적었는데, 명 또는 자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형성에 의해 글자 수가 급격히 늘었다. , 진나라와 한나라를 기점으로 문이 자로 바뀌면서 글자 수도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체자인 문에 소리를 입힌 것도 자라 하고, 육서의 형성(形聲)에 의해 만들어진 합체자도 자라 한다.

 

그런데, 지금 현실에서는 글자 하나하나를 가리켜 한자라 하고, 한자로 이루어진 문장을 한문이라 한다는 것이 공인되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아니, 한문과 한자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 모를 수도 있고, 어떻게 다른지 설왕설래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아니지 않는가? 학자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사람들, 입이 있으면 한번 말을 해보라. 그대들이 입 다물고 있는 동안, 사전 등을 비롯하여 대중은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학자의 양심이 있으면 한번 말을 해보라. 한문과 한자를 저렇게 구분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얘기해 보라. 무식한 동쪽 오랑캐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지 말고, 제대로 된 근거를 대라.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라고 하였는데, 다른 말로 살짝 바꾸어서 설명하자면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다는 것은 천지자연의 무늬도 있다,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니 무늬도 있다라는 뜻이다. , 천지자연은 소리와 무늬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특징이 담긴 소리와 무늬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천지자연의 무늬()가 있으니 반드시 소리()도 있다, 천지자연의 소리와 무늬가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니 반드시 무늬도 있다라고 말한 것일까? 결국 같은 말이지만 어감이 전혀 다르다. 문맥만을 언뜻 살피면 반드시 무늬도 있으니라고 하였기에, 정인지서문이 무늬만을 다루거나, 무늬와 소리를 동시에 다루더라도 주로 무늬에 대해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라고 하여, 정인지서문이 무늬()가 아닌 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계속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소리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 무늬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무늬도 있으니, 반드시 무늬가 있으니, 반드시 무늬가 있다는 것이니, 반드시 무늬가 있게 되니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불필요한 말이 되고, 문맥상 수준이하의 형편없는 글이 된다. 정인지가 그렇게 형편없는 수준의 문장실력을 가졌을까?

 

기존의 학교지식 대로, 훈민정음이 언문일치를 위해 새로 표음문자를 만드는 일이라면, 이 구절은 전혀 불필요한 말이 되고 정인지의 문장실력은 형편없는 것이 된다. 표음문자는 소리를 표기하는 글자이므로,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니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라고 하여야, 한문에 대응하는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을 세종이 새로 만든다는 말을, 뒤에서 꺼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문에는 반드시 천지자연의 무늬가 있으니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어라고 하여,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표의문자를 만든다는 것인지, 표음문자를 만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또한,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라는 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만약 字音으로 해석하지 않고 그냥 글자라고 해석하면,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라는 말은 표음문자를 만들었다는 말이 되고, ‘고인(古人)이 만들었다라고 하였으니, 훈민정음 이전에 다른 표음문자가 존재했었다는 말이 된다. 누구 말대로, 가림토가 존재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돼버린다.

 

정인지서문의 주제는 소리이다. 서문 전체에서 무늬는 다루지 않고 소리만 다루고 있다. 사물의 상형(, 모양, 무늬)에 대해서는 일체 말이 없고, 오직 소리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소리를 표기하는 글자가 없어서, ()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옥사의 곡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나마 소리를 표기하는 데에 사용되는 이두도 음성언어로는 사용할 수 없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훈민정음(正音)으로 글()을 풀이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으며(諺解), 훈민정음으로 송사를 듣게 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이두 대체 표기). 분명히, 무늬가 아니라 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니, 정인지서문만 아니라 한글과 관련하여 모두 다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무늬가 있게 되니라고 말하여, 마치 이제부터 무늬에 대해 말할 것처럼 보인다. 아니, ‘반드시 글()이 있으니라고 했으니, ()에 대한 얘기가 반드시 뒤에 따라와야 한다. 하지만, 두 눈을 씻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에 대한 얘기는 눈꼽만큼도 없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이 매달려도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에 대한 얘기를 왜 꺼냈을까?

 

천지자연에 있다는 무늬()는 곧 한문()을 말하는 것이며, 옛날 사람이 소리에 따라 만든 글자()는 바로 한자(字音)를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동문동궤라는 원칙을 어길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주장하기에 앞서, 그 주장에 대응하는 서두(序頭)에 해당한다. 성기가 다른 외국의 어음을 중국의 자음으로 표기하는 것은 자루와 구멍이 맞지 않는 호미와 같으므로, 외국은 자기 처지에 맞게 다른 문자를 만들어 어음을 표기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용하변이(用夏變夷)에 의해 외국(九州之外=夷狄)도 중국의 자음을 써야 한다는 원칙, 그 중국자음이 그냥저냥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후세에 바꿀 수 없다는 원칙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자음은 왜 바꿀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자음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먼저 설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늬(漢文)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漢字)는 문(漢文)에 소리를 입힌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곧 반드시 천지자연의 무늬가 있다는 말을 서두에 꺼낸 것이다.

 

, 소이(所以)의 해석에 대해서 숙고하면, 홈페이지 실록의 번역자는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을 통하여서, 삼재(三才)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라고 번역하여, 후세에 변경할 수 없게 된 이유가 옛날 사람이 그렇게 해놓았기 때문이라고, 잘못 해석하고 있다. 무조건 所以=까닭으로만 해석하려 하고, 문법적으로 所以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숙고하지 않은 잘못이 있다. 그래서, 실록의 번역자는 所以변경할 수 없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所以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를 가리키는 것이다. ,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냐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하면, ‘(~때문에) 옛날 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게 된 바이다.’로 직역할 수 있다. , ‘소리가 있고 반드시 무늬가 있었기 때문에 옛날 사람이 (그 무늬를 가지고) 소리에 따라 글자로 만들어라고 해석해야 된다는 말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천지자연의 소리와 무늬가 있는 (무늬를 표현한 은 있지만 소리를 표현하는 가 없었던) 까닭에 옛날 사람이 무늬를 소리에 따라 글자(=漢字)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글자로써 만물의 정을 통하였고, (사람들이 서로) 글자로써 삼재의 도를 실었기에, 뒷세상에서 (자음을) 변경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은 문자언어이고 는 음성언어이다. 그래서, 천하 사람이 자연어로 서로 소통하기 어려울 때 을 써서 소통하는데, 반드시 종이와 붓을 필요로 하여 소통에 어려움이 있으나, 를 사용하면 아무 때나 소통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일상적인 대화에서 를 써서 소통할 뿐만 아니라(以通萬物之情), 학문적인 대화에서도 를 써서 소통할 수 있었다(以載三才之道). 는 그렇게 천하 사람의 공용어가 되었으므로, 후세에 ()를 함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정리하면, 정인지서문은 훈민정음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음(어음, 자음)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음 중에 하나인 자음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반드시 문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곧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이 있으니라고 말한 것이다.

 

다음은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정보이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배움이 부족한 필자는 한문에도 문외한이라, 항상 기본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때문에, 기본에 충실하여 옥편이나 국어사전을 먼저 찾아보고, 인터넷 검색을 하여 견문을 넓혀서, 기존의 지식에서 오류를 찾으려 할 뿐, 기존의 지식에 반대하여 새로운 지식을 처음으로 만들려 하는 것이 아니다.

 

{드보 2015.03.26. 21:12

한문(漢文)에서 유래된 용법입니다.

한문에서 (바 소)는 뒤따르는 구를 명사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하는 바‘~하는 것정도로 해석이 되기 때문에 바 소라는 훈음이 붙었습니다.

는 한문에서 (할 위) 자와 마찬가지로 '하다'라는 뜻으로도 많이 쓰입니다.

, 뒤따르는 말이 동사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문에서 어떤 일의 원인이나 이유를 표현할 때 자주 이런 식으로 문장을 씁니다.

A 所以B: A함은 곧 B하는 바이다. (A하면 B한다)

, A가 원인이고 B가 결과가 됩니다.

[출처] 소이(所以) (한자능력검정시험 뽀개기) |작성자 5급 따기 노력 ; 댓글 중에서}

 

이것은,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고 반드시 천지자연의 무늬가 있다는 원인이고, 그 원인을 바탕으로 옛날 사람이 소리에 따라 글자로 만들어서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 ‘무늬가 있으니까, 무늬에 소리를 붙여 글자로 만들었다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다는 것은 즉 반드시 천지자연의 무늬도 있다는 말이다. (천지자연의 무늬를 표현한 문<漢文>이 이미 존재하였기) 때문에, 고인이 무늬에 소리를 붙여 글자(漢字)로 만들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올바르다. ‘반드시 무늬도 있으니라고 했으니, 무늬에 관한 말이 반드시 뒤쪽에서 언급되어야 문맥이 맞고, 매끄러운 문장이 된다. 결론적으로, ‘옛날 사람이 (무늬를) 소리에 따라 글자로 만들어서라는 문장 속에는 무늬를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직역하면,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음은 곧 반드시 천지자연의 무늬가 있는 바이니(), 그래서() 옛날 사람이 소리에 따라 글자로 만들어서, 이로써 만물의 정을 통하였고, 이로써 삼재의 도를 실었기에, 뒷세상에서 바꿀 수 없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맞다.

 

말을 바꾸어서 풀이하면,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듯이 반드시 천지자연의 무늬도 있어서 (천지자연의 무늬를 표현한 한문이 있으나 천지자연의 소리를 표현한 한자가 없었다, 모양<무늬, >이 있는 한문이 있지만 소리가 없어서 음성언어로 사용하지 못했었다), 그런 까닭에 고인이 천지자연의 소리에 따라 한문에 음을 달아 한자로 만들어서 (음성언어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과 정인지 등이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목적 중에 하나는, 문자(文字)의 음을 더 쉽게 표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천하의 자음, 즉 이른바 중국어라 불리는 음성언어를 더 쉽게 통일하는 것이다. 세종과 정인지, 최만리 등의 궁극적 목표는 동방의 공용어인 중국어로 동방의 음성언어를 통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어 즉 한문서적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한문서류를 잘 작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훈민정음으로 언해하고 훈민정음으로 서류를 작성하려 한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한문서적을 잘 이해하고 한문서류를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다면, 어음을 표기하는 데에 훈민정음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음 자체가 없어졌을 것이다. 세종은 이상(理想)인 문자로써 동문동궤하는 것과 현실인 어음을 표기하는 것, 두 가지를 다 이루려 하였고, 최만리는 오직 이상만을 좇았다.

 

세상사람 모두가 착각하기를, heaven(하늘)이라는 뜻의 /티엔, , , /이라 발음되는 중국어가 있었고, //을 표기하기 위해 이라는 문자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진시대(前秦時代)의 중국은 한국어와 동일한 계통의 자연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아니, 최근 20c 초까지 중국은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어가 아니라 언어(諺語)이다. , 중국에는 인공어(人工語)인 현 중국어(漢字)와 자연어인 언어(諺語, 方言)가 있었다는 말이다. 현재 중국계의 여러 학자가 밝혀내고 있는 바에 의하면 그것이 사실(fact)이다. 예를 들면, 전진시대에는 프람, 퍼람등으로 발음했다고 한다. , 지금의 우리나라 사람이 한문, 한자라 부르는 것은(특히 일본이 그렇게 부르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그렇게 부른다), 전진시대까지 문(금문, 대전, 소전 등)이 있었고 한문이나 한자가 없었는데, 한나라 때 들어와서 전진시대의 문을 다듬어 한문을 만들고, 한문에 음을 달아서 한자로 만들어, 문자를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만들어 천하의 공용어로 사용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화문(白話文)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중국어가 인공어라는 증거이다. 백화문은 중국의 이두이다. 백화문의 시작을 당나라로 보는데 설총의 이두와 그 시기가 같다. 지금의 보통화는 신문화운동 이후로 자연어인 백화와 인공어인 한문의 문법을 적절히 섞어서 새로이 만든 인공어이다.

 

혹자는, 한문은 종이의 제약 때문에 백화를 축약하여 문언문(고전, 고한문)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중국어(한문)는 자연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축약하였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문은 인공어라는 것을 뜻한다. 여러 형태의 백화문은 한문과 함께 천년 이상 존재했었는데, 어순에 있어서도 백화문과 한문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우리가 이두나 언문을 경시한 것처럼 백화문을 경시하였다. 한국어와 한문의 차이처럼 백화문과 한문의 차이도 큰데, 이것은 단순한 말투의 차이가 아니라 별개의 두 가지 언어이기 때문에 생기는 차이이다. 다시 말하면, 한문과 백화문의 차이는 표준어와 사투리의 차이가 아니라, 한국어와 일본어의 차이와 같다.

 

혹자가 착각하길, 한문은 백화를 표기하는 표기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중국인이 실제로 한문을 읽을 때에는 백화문으로 읽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백화가 음성언어이듯이, 한문도 음성언어로서 사용되었다. 동국과 중국의 선비는 서로 한문으로 대화했지 백화문을 사용하지 않았다. , 백화문은 자연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방법인 이두이고, 한문은 인위적으로 만든 공용어이다. 바꾸어서 말하자면, 중국의 백화는 현 한국어와 같은 언어라는 뜻이다. 지금의 백화문이 한국어의 어순과 다른 이유는, 자연어인 백화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한문의 문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 표음문자가 없었기에 자연어를 그대로 표기하지 못하고, 한자를 사용하여 어설프게 자연어를 표기하면서도, 문법은 한문의 문법을 따랐다는 말이다.

 

백번 양보해서, 설령 한문이 백화를 축약하여 표기한 문자라 하더라도, 언문일치를 위해 백화문이 만들어졌고, 서로 통하지 않는 백화문과 한문의 차이를 보면, 중국인에게 있어 한문은 결코 언문일치가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한문에 대해 느끼는 것처럼, 백화문인 보통화를 쓰는 중국인에게 한문은 매우 어려운 언어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역사학자와 국어학자가 말하는, 세종 당시의 중국어(한문)는 중국에서 언문일치를 이루고 있는데, 우리 한국어는 한문과 문법이 달라 언문일치를 이루지 못했기에, 새로 훈민정음을 만들어 언문일치를 이루고자 하였다는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 중국도 언문일치가 되지 못하고 있었고, 중국의 언문일치를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혹자는, 세종 당시 언문일치를 이룬 중국어는 한문이 아니라 백화문이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중국인은 한자로 백화문을 작성하여 언문일치를 이루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세종은 그 백화문을 보고 중국은 언문일치를 이루었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백화문은 이두처럼 경시되었다. 우리나라처럼 중국도 주류는 백화문이 아니라 한문이다. , 세종이 중국은 한자로 언문일치를 이루었다고 여겼다면, 한문을 가리키는 것이지 백화문을 가리키는 것이 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한문은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언문일치가 아니다. , 우리말의 어법이 중국말의 어법과 달라, 한자로 우리말을 표기하기 어려워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기존의 지식은 새빨간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종의 훈민정음서문이 말하는 바는, 우리말의 어법이 중국말의 어법과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말의 발음이 중국에서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말의 발음이 중국에서 달라지고, 문자(중국어, 한문)의 발음도 우리나라와 중국이 서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교육 현장에서, 우리말의 언문일치를 말하면서 우리말에 문어체와 구어체가 있다고 교육하는데, 우리말에는 문어체와 구어체가 없다. 한문, 한자라는 용어처럼 문어체와 구어체는 일본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용어이다. 우리말에는 평어와 존대어가 있고, 현대어와 고어가 있고, 한자 단어와 순우리말 단어가 있고, 바른 말과 틀린 말이 있고, 교양어와 비어가 있을 뿐이지, 문어체와 구어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굳이 문어체와 구어체를 나누자면, 고문이 문어체이고 백화문이 구어체이듯이, 한문이 문어체이고 우리말이 구어체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언문일치는 조선말에 있었던 한문전용을 국한문혼용으로 바꾼 것을 가리킨다. 국한문혼용은 우리말 어법에 한자어만 한자로 쓴 것이라, 국한문혼용 이후로 우리나라는 언문일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어인 백화문은 완전한 언문일치가 아니다. ‘대중어문 운동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중국의 자연어가 현 한국어와 동일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현 중국어가 탄생한 과정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 중국어의 정체를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서기 100년경의 설문해자에는 약 1만자의 한자가 실려 있지만, 서기 1716년의 강희자전에는 약 47천자 이상의 한자가 실려 있어서, 이것만 살펴도 중국어는 자연어가 아니라 인공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천년 동안 4만자 이상의 새로운 한자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중국어가 인공어라는 명확한 증거이다. 사전에 실린 우리말 단어는 50(전문어 19, 북한어 7, 사투리 2, 옛말 1, 중복단어 등)이고 영어도 50(영어권 전체)이다. 그런 식으로 중국어의 단어를 비교하자면, 한 글자로 이루어진 5만이라는 단어는 너무 적은 숫자이다. 그렇다고 하여, 1만의 한자를 서로 조합하여 두 글자 이상의 단어를 새로 만들어, 수십만 단어의 현 중국어를 만든 것이 아니다. 1만과는 별개로 4만의 한 글자 단어를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5만으로 수십만의 현 중국어 단어를 만들어 낸 것인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만의 글자가 있었는데, 4만의 글자를 새로 만들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1만의 글자를 만든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것 다 제쳐두고, 한 글자 단어가 5만개나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말의 경우와 비교하면 애초부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 한글로 표기하여 사용하는 음은 3,192자이고, 실제 사용하는 발음은 2,912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뜻을 가진 단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설문해자에 실린 모든 한자가 자연어라면, 육서의 회의와 형성은 무엇인가? 백번 양보해서 상형과 지사의 발음이 자연어의 발음이라 치면, 상형과 지사에 의해 만들어진 글자를 서로 조합하여 회의와 형성으로 새 글자를 만들었는데, 회의와 형성으로 만든 글자의 발음은 자연어의 발음인가? 회의도 그렇지만, 특히 한자의 8~90%를 차지하는 형성의 발음을 자연어의 발음이라 할 수 있는가? 모양()을 나타내는 부분과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을 서로 합쳤는데, 새로 만들어진 글자의 소리가 소리 부분의 소리와 같거나 비슷한데, 그것을 자연어의 발음이라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누가 보아도 인위적으로 만든 발음이다. 중국어는 어떻게 살펴보더라도 인공어라는 것이 명백하다.

 

동국의 역사가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알겠는가? 이른바 식민사학과 민족사학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르겠다. 식민 지배를 위해, 동국인이 독립이나 자주 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식민사학의 목적이고, 동국과 중국을 분리시키는 것이 식민사학의 목표인데, 민족사학은 식민사학의 목표는 모른 채 식민사학의 목적만을 깨기 위해, 허구의 혈연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대한민국(한반도)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내세워, 7만년 동국사(東國史)를 왜곡하는 데에 그 누구 보다 앞장서고 있다.

 

古人을 단순히 옛날 사람이라 번역하여 옛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라 해석하는데, 이 또한 그렇게 단순하게 볼 것이 아니라 세심하게 살펴볼 일이다. 대체로 고인(古人)옛날의 성인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단순히 과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뜻이 아니라, 옛날에 살았던 성인 수준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 나름 존경의 대상이 될 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여기서는 한나라 때 한문과 한자를 완성시킨 학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왜곡된 역사지식을 배운 현재의 우리는, 여러 고전에 등장하는 중국의 여러 고인(古人)을 남의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옛날 우리 조상들은 중국인을 남(他人)으로 여기지 않았다. 실록을 비롯한 여러 국가 기록물과 수많은 개인문집 등, 그 어떤 서적에서도 중국인을 남으로 여기는 경우가 없다. 만약 필자의 말이 의심되는 독자가 있다면, 여러 고전을 직접 찾아보고 반론하면 된다. 간혹 동국인과 중국인을 구별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지역적인 차이를 의미하지 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경상도 사람이 이순신을 숭배하고 우리 조상이라 여기지만, 경상도와 인연이 없음을 이유로, 오랫동안 나라의 중심에 있었던 경상도에는 왜 이순신과 같은 성웅이 나오지 않느냐며 투덜거렸다면, 그것은 지역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지 이순신을 남의 나라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동국의 여러 서적에 등장하는 중국의 고인은 그냥 고인이라 되어있지 중국의 고인이라 되어있지 않다.

 

四方은 네 방위 즉, 중앙(中土)을 제외한 네 주변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구주(九州)의 바깥쪽인 외국(外國=九州之外)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해(四海)와 같다. 최만리상소문에서 부정적인 뜻의 이적(夷狄)’이라 표현한 것에 대하여, 여기 정인지서문에서는 사방의 외국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상소문에 대한 반발심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랑캐라는 말의 어원을 알 수는 없지만, 역대 동국과 중국에서 오랑캐는 무식한 촌놈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중화(中華=文明) 즉 도시(都市)는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서, 촌에 비교하여 예악이 갖춰져 있고 배울 기회가 많아, 도시 사람은 유식하고 예의가 바르다. 그에 비해, 촌은 사람이 모이지 않고 예악도 부실하여 배울 기회가 적어, 촌놈은 무식하고 예의가 없다. 그러한 논리에 의해 오랑캐를 천시하는 것이다.

 

外國은 중국 또는 내국(內國)에 상대되는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중국 본토를 아홉 개의 땅으로 나누어 구주(九州)라 하는데, 정말로 딱 아홉 개로 나뉘기 때문이 아니라 땅(天下)을 상징하는 숫자가 9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숫자가 5이기에 5()을 두었듯이, 땅을 상징하는 숫자가 9이기에 천하를 9(九州)라 하는 것이다. 또 중국, 중토, 중원 등은 9주의 중앙 즉 중주(中州)를 가리킨다. 따라서, 9주는 중국의 통치권이 직접 미치는 지역으로서 구주지내(九州之內) 또는 내국(內國)이라 하기도 한다. 엄밀히 따지면 차이가 크지만, 일반적으로 중국과 구주와 내국을 동일한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적(夷狄)이 사는 구주지외(九州之外)를 외국이라 하는데 중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다. 원래 종교적으로 외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땅 즉 천하는 9개로 이루어져 있고 그 바깥은 허공()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 존재하므로, 이상과 현실을 혼합한 세계관에서 구주지외의 외국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우리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를 흔히 외국(外國)이라 하는데, 외국은 잘못된 호칭이고 타국(他國)이라 하여야, 언어적으로 바른 표현이 된다. 마찬가지로, 외국인 내국인 등의 표현도 모두 잘못된 호칭이고, 타국인 아국인(我國人)이라 하여야 맞다. 이렇게 언어의 혼란이 있게 된 원인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동아시아를 지배한 섬나라 일본에게 있다. 구주지외의 일본이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고 섬나라 특유의 무식함으로 무장하여, 동아시아를 지배하면서 한자문화를 왜곡하고 동국사를 왜곡한 것에 그 원인이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가 남의 나라를 외국이라 칭하는 것은, 우리의 언어 속에 동국의 정체와 역사가 숨겨져 있다는 증거이다.

 

지금의 역사학자라는 이들은, 동국을 일본이나 여진처럼 외국에 속하는 나라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동국은 외국의 지역에 위치해 있을 뿐이지 외국이 아니다. 천하는 동국과 중국 그리고 외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국은 하늘나라이며 탈속의 나라이고, 중국은 천하의 중심 나라이며 속세의 나라이다. 동국인과 중국인은 몽고 일본 여진 등을 비롯하여 서양나라를 모두 외국이라 여기고, 존화양이를 외친 것이다. 동국인은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를 이적 즉 외국으로 여겼다. 그런데, 동국과 중국이 분리되고 일제에 의해 강점되었다가 대한민국이 되면서, 우리나라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외국이 되어버렸다. 언어적으로 따지면 타국이라 하여야 맞지만, 한국이 고난을 겪으면서 외국이라는 단어에서 오랑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라지고, 사실상 타국과 외국이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므로, 원래 자주 쓰던 단어인 외국이 그대로 쓰여서, 지금의 우리는 타국을 외국이라 칭하는 것이다. 동양 역사와 세계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외국이라는 단어를 매우 기분 나빠할 것이다.

 

여기 정인지서문에서 외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동국이 동방의 바티칸으로서 중국과 외국 모두를 다스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스리다라고 하니, 서양 제국주의의 식민지나 일제 강점기 같은 통치 방식만 생각할 수 있으나, 동국이 다스리는 동방의 연방제는 제국주의와 많이 다르다. 서양 중세의 바티칸이나 UN, 미연방의 워싱턴DC와 같다 할 것이다.

 

假中國之字는 단순히 중국의 글자 즉 한문을 빌렸다는 뜻이 아니라, 중국의 자음 즉 한자를 빌렸다는 뜻이다. 한자의 발음 그대로는 각 지역의 어음과 일치하지 않으므로, 동국과 중국에서는 이두를 만들어 어음을 표기한 것이며, 외국은 각자 처지에 따라 따로 표음문자를 만든 것이다. 정인지서문은, 그 중국의 자음을 외국의 어음에 억지로 사용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고, 중국도 이두 대신 표음문자를 새로 시행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음과 자음을 표기하는 새 문자를 시행하겠다는 것이지, 문자를 어찌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문자의 발음을 정확히 표기하여 문자로써 음성언어를 통일하려 하고 있다.

 

柄鑿之鉏鋙는 직역하면 자루와 구멍이 (서로) 어긋난 호미, 자루와 구멍이 (서로) 맞지 않는 호미라는 뜻이다. 따라서, 蓋外國之語有其聲而無其字假中國之字以通其用是猶柄鑿之鉏鋙也대체로 외국의 말은 그 소리가 있으나 그 글자(표음문자)가 없어 중국의 글자(자음)를 빌려 (중국글자)로써 어음에 사용하여 통하게 하니 이것이 오히려 자루와 구멍이 어긋난 호미가 되었다라고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要皆各隨所處而安不可强之使同也요는 모두 각 처지에 따라 편안하면 되지, 강제로 같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분명히 不可옳지 않다, 가능하지 않다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면 강제로 같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 정인지가 저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동국이 동방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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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東方禮樂文物, 侔擬華夏, 但方言俚語, 不與之同,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昔新羅 薛聰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

우리 동방의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중국에 견주되었으나 다만 방언(方言)과 이어(俚語)만이 같지 않으므로, 글을 배우는 사람은 그 지취(旨趣)의 이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고,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사람은 그 곡절(曲折)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로워하였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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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方은 동아시아를 뜻하는 단어이다. 동국이 동방 즉 동아시아를 다스렸다. 동국이 중외(中外) 즉 중국과 외국을 다스렸다. 동방은 동양(東洋)과 같은 말로서, 19세기 중엽까지는 서역(西域)에 대응하는 동방이라는 말이 쓰였으나, 19세기 말부터는 바다로 침입하는 서양 세력에 대응하여 동양이라는 말이 주로 사용되었다. 분명히 東方=동아시아, 東國=한반도인데도, 현재 한국의 역사학계는 東方=東國이라 말한다. 식민사학이나 민족사학이나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동국의 역사가 왜곡되었는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하는지 막막하다.

 

앞글에서 中外는 중국과 외국을 함께 가리키는 단어라는 근거를 대었고, 실록에서 중외가 어떻게 쓰였었는지 언급했었다. 여기 정인지서문에 등장하는 東方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방은 중국과 외국으로 되어 있고, 동국이 동방 즉 중국과 외국을 다스린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학계는 식민사학에 의해 이를 완전히 왜곡하여, 동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거짓말로 사기를 치고 있다. 대중을 홀리기 위해 모순되는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말로는 동국은 독립국으로서 중국의 속국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내어놓은 역사적 자료들은, 누가 봐도 동국이 중국의 속국으로 보이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한국 역사학계의 결과물을 그대로 받아들인, 중국과 일본의 역사학계는 동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것을 진실이라 여긴다. 중국과 일본에게는 손해될 것이 없다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방(東方)을 동아시아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필자의 말이 믿기지 않으면 직접 중국인과 일본인에게 확인하면 될 일이다. 유독 현 한국의 역사학자만이 동방=동국=한반도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도 동방=동아시아라는 사실을 최근까지 알고 있었다. 여러 증거가 있지만, 그 중에 명확한 것,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확한 증거 두 가지를 여기에 올린다.

 

[“東夷문화 華夏문화와 쌍벽”/ 경향신문, 1978.04.11. 기사(칼럼/논단)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金聖鎭문공장관은 10일저녁寬勳클럽 토론회에서우리가 우리문화의 源流를 찾지 못하고 東西洋문화를 는할경우 자칫하면 우리자신을 사이비환경속으로 몰아넣을우려가 있다고 경고. 장관은우리문화를 논할때 흔히 그 원류를 中國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東方에는일찌기 동쪽에 東夷문화와 중국지역의 華夏문화등 쌍벽을 이루는 두개의 문화원류가 있었다는 夷夏東西設이 있다고 소개하고따라서우리는 우리나름대로의 전통문화를찾고 계발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것이라고 역설. 장관은 한편 外國기자들의 對韓보 도자세에 언급,“모르는 北韓에 대해서는 무엇이든美化하려는 자세가 간ㅔ 혹 당혹한 감을 갖게 한다고 말하기도.]

 

[勞農赤化策 東方注力/ 동아일보, 1927.06.18. 기사(뉴스)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露西亞歐洲赤化英露斷交波瀾公使事件等으로頓挫되엿슴으로東方赤化努力하야波斯에서排英赤化를하고中國하야는河南馮玉祥氏援助하야中國共産黨과의提携하고東方諸國赤化劃策한다더라(莫斯科十六日發)]

 

위 두 사례에서, 東方은 명확하게 한반도가 아닌 동아시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 말고도 일제 강점기의 여러 신문을 살펴보면, 같은 사실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한중일 삼국은 동방을 동아시아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한국의 식민사학은 동국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거짓을 퍼뜨리기 위해, 수많은 고전에 등장하는 동방이라는 단어를 한반도로 해석하였다. 만약 사실대로 동방을 동아시아라고 번역하면, 동국이 동아시아를 지배했다는 진실이 드러날 수 있으므로, 철저하게 동방=동국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

 

禮樂文物의 예는 禮義로서 관습이나 법률, 제도 등 사회적 규범의 모든 것을 뜻하고, 악은 樂歌로서 현재의 음악, 더 나아가서는 예술(藝術)이라는 단어와 같다. 지금의 우리는 예술이 문명의 결과물이라 여기지만, 동방의 선비는 예술은 문명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 여겼다. 문물은 현재의 문화와 같은 말인데, 문장(文章)과 물산(物産)의 합성어로서, 문물이 번성한 것을 화() 또는 문명(文明, 文章之明)이라 한다. , 예악을 바르게 하여 문물을 융성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政治)이고, 정치의 결과로 문명이 이루어지고 백성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지배층은 정치에 대한 정당성을 얻는다.

 

지금은 종이를 비롯한 문물이 발달하여 예술의 분야가 많지만, 옛날에는 많은 제약이 있어 여러 분야 중에 춤을 포함한 악이 가장 활성화 되었다. 그래서, 악이 예술을 대표하는 단어로 쓰인다. 물론, 고대의 예()는 현재의 예술과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실록에서는 예악문물이라 하였는데, 해례본에서는 예악문장이라 하였다. 이성이 발달할수록 보다는 을 중시하고, 훈민정음으로 하려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물산도 증대하는 것이지만, 일차적으로 문장을 부흥시키는 일이므로, 해례본에서는 예악문장이라 한 것이다. 문장이 밝아지면 물산은 저절로 커진다.

 

예부터 우리 동국을 가리켜 예의지방(禮義之邦, 禮義之國) 또는 문헌지방(文獻之邦)이라 하였는데, 예의지방과 문헌지방은 동국이 동방의 바티칸임을 증명하는 단어이다. 이것은 자화자찬이나 듣기 좋은 말로 쓰인 것이 아니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를 그렇게 부른 예가 없다. 예의지방과 문헌지방은 사실상 같은 뜻이다. 예의란 모든 사회적 규범을 뜻하는 말로서, 개인적인 예절부터 법률이나 제도 등 국가적인 규범까지 모두를 가리킨다. 文獻이란 현재의 법률이나 제도, 문물 등의 근거가 되는 서적을 가리킨다. 혹자는 옛날의 제도나 문물...’이라 하는데, 지나간 옛일을 떠올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냥 옛날의 추억을 보관하고 있다 하여 문헌지방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옛날 서적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다. 현재 즉 당시 동방의 법률이나 제도를 꾸준히 다듬는데 있어, 자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옛것에 근거하여 시행한다는 의미이다. , 예의지방과 문헌지방은 동국이 동방의 예의를 꾸준히 꽃피우는 데에 있어, 항상 옛것 즉 문헌에 의거하여 행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만리상소문에서 세종의 언문정책이 근거 없는 일이라며 반대하는 것이다. 또한, 정인지서에서도 그에 맞서, 비루한 이두는 근거가 없는 것이라며, 이두를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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盡反於古實無所據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又輕改古人已成之韻書附會無稽之諺文 또 가볍게 옛사람이 이미 이룩한 운서를 고치고 근거 없는 언문을 부회하여

非但鄙陋無稽而已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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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의 책무 중에 하나는 동방의 예의를 다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문헌에 근거하여 행한다. 그래서 동국을 예의지방, 문헌지방이라 하는 것이다. , 동국은 동방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동방의 기준이라는 것은, 동국이 동방의 바티칸이라는 말과 같다.

 

侔擬는 직역하면 가지런히 비교하다라는 뜻인데, 길게 풀이하면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지런히 놓고 비교해 볼만 하다라는 뜻이다. ,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면 서로 비슷하다라는 뜻인데,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비슷한 단어로 상소문에 등장하는 比擬가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서로 같은 수준을 뜻하는 것이지 서로 같다, 서로 동일하다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華夏는 역대 중국 중에 첫 왕조 하나라를 특정하여 가리키는 단어이다. 학계는 여러 고전에 등장하는 中國, 中華, 華夏, 中原, 中土, 中朝 등을 모조리 중국이라고 번역하고 해석한다. 눈이 달려 있다면, 조금만 살펴보면, 무조건 중국이라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나태하여 그러한 것인지, 무식하여 그러한 것인지, 고의적으로 그러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역사학자라는 간판을 떼는 것이 도리에 맞다.

 

中國은 일반적으로 中原을 뜻하나 中朝를 뜻하기도 한다. 中土中原과 같은 말로서 사람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 천하의 중심지를 뜻한다. 中朝는 중국조정(中國朝廷)을 말하는데, 일제에 의해 간행된 고종실록 등에서 중국과 조선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明朝, 淸朝 등은 말 그대로 특정한 중국인 명나라 조정, 청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中華중국이 꽃피다라는 뜻으로서 문물이 융성한 중국, 중국의 문물이 발달한 상태를 가리킨다. , 중화는 문명이라는 말과 같다. 동방의 세계관에서 는 중화만 있을 뿐, 일본의 화, 몽고의 화, 여진의 화 등은 있을 수 없다. 華夏는 역대 중국 중에서 최초의 왕조이면서 중화의 모범이 되는 하나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동방의 선비들은 하나라를 중화의 모범으로 여기고 있다.

 

方言俚語는 방언과 리어를 말한다. 방언은 중국의 자연어를 가리키고 리어는 동국의 자연어를 가리킨다. 방언이라는 단어는 단수형이면서 복수형의 뜻을 지닌 단어이다. 형태는 지역말이라는 단수형이지만 뜻은 각 지역말이라는 복수형의 단어이다. 리어는 특정 지역인 한반도를 가리키고, 방언은 중국대륙 전체를 가리키지만, 대륙 전체가 하나의 언어로 통일된 것도 아니고, 지역별로 차이가 크기 때문에 복수형의 뜻을 가진다. 방언을 사투리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될 수 있지만, 한반도의 사투리를 뜻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세종 26220일 경자 1번째기사)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凡于文字及本國俚語 (세종 251230일 경술 2번째기사)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본국의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명확하게, 중국 구주의 안에서 쓰이는 말을 방언(方言)이라 하였고, 본국 즉 우리나라의 말을 리어(俚語)라 하였다. 여러 고전을 다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방언은 중국 각 지방의 자연어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리어는 한반도의 자연어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그냥 동국과 중국의 구분이 없이 쓰일 때에는 언어(諺語)라 하고, 교양을 따질 때에는 鄙諺(천한 상말), 鄙陋(천한 루언, 비언과 루언) 등으로 쓰고 있다.

 

만약 방언이 우리나라의 사투리를 가리키는 것이고, 또 학계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면, 但方言俚語不與之同의 해석은 우리나라의 사투리와 우리나라의 리어가 중국말과 같지 않다가 된다. 그러나, 그냥 우리말이 중국말과 같지 않다고 해야 자연스럽지, 우리나라의 사투리가 중국말과 같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르다거나, 서울말과 지방말이 다르다고 해야 자연스럽지, 우리의 지방말이 중국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또 혹자의 말처럼, 리어가 우리말의 사투리 즉 우리말의 비속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방언이 사투리이고 리어가 비속어라면, 방언리어가 중국과 같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사투리와 비속어가 중국말과 다르다는 말이 되므로,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된다. 사투리나 비속어는 그 나라의 표준어와 비교되는 것이지, 남의 나라 언어와 비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투리가 서울말과 어떻게 다르냐를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사투리가 중국어와 다르다고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不與之同더불어 같지 않다, 함께 같지 않다이다. , ‘다만 방언과 리어는 예악문물과 더불어 같지 않다, 다만 방언과 리어는 예악문물과 함께 같지 않다라고 번역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吾東方禮樂文物侔擬華夏但方言俚語不與之同우리 동방의 예악문물은 화하에 견줄 수 있으나, 다만 방언과 리어는 예악문물과 더불어 같지 않다(다만 방언과 리어는 예악문물처럼 화하에 견줄 수 없다)’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 동아시아의 예악문물은 옛 화하 때처럼 융성하나, 다만 방언과 리어는 화하 때처럼 융성하지 않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화하 때는 방언과 리어가 어떠했는데 지금의 방언과 리어는 그렇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화하 때의 방언리어가 어떠했는지 알지 못하니, 지금의 방언리어가 어떠한지를 먼저 알아보자. 뒤에 이어지는 말을 살펴보면 지금의 방언리어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말은, 학서자가 서책의 뜻을 알기 어려워하고, 치옥자가 옥사의 곡절을 알지 못하고, 이두를 시행했지만 단점이 많다고 한다. , 이른바 언문일치(言文一致)가 되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정인지서문의 뒷부분에서도 언급되지만, 서책을 훈민정음으로 풀이하면 글의 뜻을 알 수 있고, 훈민정음으로 조서를 작성하면 곡절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언문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두의 목적도 언문일치인데, 여러 단점이 있어서 이두 대신 훈민정음을 쓰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방언리어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표음문자가 없어서 언문일치를 이루지 못했다는 뜻이다.

 

분명한 것은, 방언리어를 표기하겠다는 뜻이지, 한문 때문에 언문일치가 안 된다거나, 한문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말은 아니다. 한문은 한문으로써의 역할이 있고, 방언리어를 표기하는 문자는 따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화하 때 방언리어가 어떠하다는 것은, 화하 때는 방언리어를 표기할 수 있는 표음문자가 따로 있었다는 뜻이거나, 따로 표음문자가 없었다면 공용문자(公用文字)로써 언문일치를 이루었다는 뜻이다. 어쨌든, 지금의 방언리어를 그대로 표기할 수 있는 표음문자가 없기 때문에, 학서자와 치옥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吾東方) 예악문물이(禮樂文物) 중국(華夏)과 비슷하나(侔擬) 다만() 방언과(方言) 리어가(俚語) 같지 않다(不與之同), 한반도의 예악문물이 중국대륙과 비슷하나 다만 방언과 리어는 중국어처럼 언문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한자로 언문일치를 이룬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한자로 언문일치를 이루지 못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에서 다 설명했듯이, 백화문이 있는 중국의 한문은 언문일치가 아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한문으로는 언문일치를 이루지 못한다. 훈민정음으로 언문일치를 이루려고 한 것은 맞지만, 세종이 동국과 중국을 서로 비교한 이유는, 동국의 언문일치 때문이 아니라, 동국과 중국의 언어통일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 정인지서문에서는 동국의 언문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국과 중국 모두의 언문일치를 말하고 있다. , 동방은 동아시아를, 방언은 중국의 각 지역어를 가리키는 단어이므로, 동국과 중국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옛 천하와 지금의 천하를 서로 비교하는 것이다.

 

아주 쉽고도 매우 상식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일이 하나 있다. 현 중국어는 자연어이고 중국어와 한자가 언문일치를 이루었다는 착각이다. 애초부터 자연어의 음을 그대로 표음하여 만들어낸 것이 한자라 여기고 있다. , 중국어가 자연어라 여기고 있는 것이다. 중국어(보통화)가 인공어가 아닌 자연어이고, 자연어를 그대로 언문일치하여 표기한 것이 한자라면, 한자는 당연히 표음문자이다. 정인지서문에서도 소리에 따라 글자()를 만들었다 하였으므로, 한자는 표음문자가 맞다. 그렇다면, 기존의 지식대로 한자는 표의문자이기도 하니, 한자는 표음문자이자 표의문자가 된다. 그러나, 표음과 표의가 동시에 되는 문자가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고, 더구나 한자가 표의문자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표음문자라는 말은 처음이다. 기존의 지식에서도 한자가 표음문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 9123자모 또는 36자모 하는 것들은 또 무엇인가? 36자모 91운이 불편하다고, 주음부호를 만들고 병음을 만들고 하는 것들은 또 무엇인가? 정말로 한자가 표음문자인가?

 

한자를 표음문자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애초부터 자연어의 음을 표음하여 한자로 만든 것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한자의 음이 자연어의 음을 그대로 표음한 것이 아니라면, 한자는 기존의 지식대로 표의문자가 맞고 표음문자는 아니다. 한자가 표음문자가 아니라는 말은, 중국어는 한자로 언문일치를 이룬다는 말이 거짓이 되며, 한자의 음으로 이루어진 중국어는 자연어가 아닌 인공어가 되는 것이다.

 

한글 자모의 조합 가능한 수는 이론적으로 11,172자이고, 실제로 발음할 수 있는 글자는 3,192자이며, 실제 사용하는 소리는 2,912자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자도 표음문자이므로 36자모 91운으로 모든 한자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어찌어찌하여 36자모와 91운으로 모든 한자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 치더라도, 그 글자 수가 5만자가 넘는 한자가 과연 표음문자이겠는가? 속자나 약자를 빼면 그 숫자가 많이 줄겠지만 역시 마찬가지이다. 발음기호로 사용되는 127자도 각자 고유의 음이 있고, 전체 5만자도 각자 고유의 음이 있을 것인데, 발음기호인 127자는 과연 자연어의 어음인가, 127자로 표기되는 5만자의 음도 자연어의 표음인가? 또한, 필요에 의해 계속 글자가 만들어지고 있다는데, 그것은 음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 이것이 과연 언문일치의 표음문자인가? , 두 글자 이상의 단어가 아닌 한 글자만으로 단어가 되는, 회의나 형성 등으로 만들어진 글자는 표음문자인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한자는 표음문자가 아니라 표의문자라는 것이 명백하다. , 한자의 음은 인공적으로 붙인 것이다. 자연어의 음이 아닌, 인공적으로 별개의 음을 붙인 한자는 표음문자가 아니므로, 중국어는 한자로 언문일치를 이루었다는 말은 거짓이다. 문법적으로는 자연어와 한자 문장이 서로 일치할지 모르겠으나, 표음적인 언문일치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중국어가 한자로 언문일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자로 언문일치가 안 되는 중국어가 자연어이겠는가? 중국어가 인공어라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논리적으로 정리하면, 중국의 자연어는 방언이라 불린 언어이고, 현 보통화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언어가 될 수밖에 없다. , 표의를 위해 만들어진 표의문자인 한문()에 각각 이름()을 붙여서 한자(字音)를 만들고, 그 한자를 음성언어로 사용한 것이 옛 중국어(古文)이고, 고문을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바꾼 것이 현 중국어이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너무나 쉽고 명확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동국의 역사를 왜곡하는 데에 모든 것을 꿰맞추려 하니, 이렇게 논리적이고 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吾東方禮樂文物侔擬華夏但方言俚語不與之同우리 동아시아의 예악문물이 옛 화하 때처럼 융성하나 다만 방언과 리어가 화하 때와 같지 않다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 동방의 방언리어는 언문일치가 안 되고 있지만, 화하 때는 언문일치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존의 지식에서 말하길,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가 우리말과 중국말의 문법적 구조가 서로 달라서, 한문으로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기존의 지식이 모두 다 거짓이라는 뜻이다. 기존의 지식에서 말하는 대로 언문일치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은 맞으나, 우리말과 중국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말과 중국말 둘 다 언문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똑 같은 말을 가지고 말장난 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전혀 다르다. 우리말인 리어와 중국말인 방언은 원래 같은 언어이고, 방언리어가 한문으로는 언문일치가 되지 않았기에, 방언리어를 표기하는 훈민정음을 만들어 언문일치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은 학서자와 치옥자가 한문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뜻이다. , 한문으로 되어 있는 책과 문서는 언문일치가 되어 있지 않기에, 글을 배우는 사람과 옥사를 다스리는 사람이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두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도, 언문일치를 이루기 위해 이두가 시행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언문일치가 되어 있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 바로 但方言俚語不與之同이다.

 

吏讀(이두)관리(胥吏)가 읽는다는 뜻이다. 역시나, 학계는 이두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전에 한번 언급했었지만, 이 기회에 이두에 대해 제대로 짚고 넘어 가보자.

 

한자로 자연어를 표기하는 이두식 표기법(향찰, 구결 등)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 이두식 표기법을 신라의 설총이 관부에서 사용하도록 시행하였는데, 그것을 이두라 하는 것이다. 학계는, 신라의 설총이 이미 존재하였던 이두를 정리하고 집대성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언뜻 보면, 필자가 하는 말이나 학계가 하는 말이나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먼저, 설총이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설총은 태호복희나 신돈, 조광조, 흥선대원군처럼 왕은 아니나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당시의 정치를 주도한 사람으로 보인다. 지위가 한림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그 지위와 상관없이 설총이 이두라는 정책을 제안하였거나, 책임자로서 이두를 시행하였을 것이다. 단순히 학자로서 이두를 어떻게 하였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 이두는 설총이 펼친 정책이다.

 

설총이 이두를 만들었다가 아니라, 이두를 시작(始作)했다가 맞다. 여기 정인지서문에 분명하게 始作으로 되어 있다. 설총이 학자로서 이두를 정리하여 집대성하였고, 그것이 차츰 관부와 민간에 두루 퍼진 것이 아니다. 설총이 정치적으로 이두를 관부에서 사용하도록 처음 시행한 것이다. 나라에서 이두를 시행하였는데, 그 책임을 설총이 맡았다는 뜻이다. 이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두는 관부에서 시행되었고, 이것이 차츰 민간에도 퍼진 것이다.

 

이두라는 명칭도, 설총이 시행했을 때 이두라고 부른 것은 아니다.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없으나, 이두는 백성이 붙인 이름이다. 이두는 일반 백성을 위해 시행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백성을 위한 것이 되겠지만, 원칙적으로 관리(官吏)를 위해 시행한 것이다. 일반 백성을 상대하는 하급관리의 편의를 위해 시행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옥사에서 조서를 이두로 작성하고, 글을 모르는 죄인에게 옥리가 그 조서를 소리 내어 읽고, 죄인은 이를 듣고 나서 조서에 수인(手印)하는 것이다. 백성이 보았을 때, 옥리가 그렇게 소리 내어 읽기 때문에, 옥리가 읽는 글을 가리켜 이두(吏讀)라 부르는 것이다. 관리가 이문(吏文)으로 백성의 일을 보게 되면 어려움이 있지만, 이두로 일을 보게 되면 더 편해진다. 관리가 편해지면 그만큼 백성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다. 그렇게 관부의 서리가 사용하던 이두를, 일반 백성도 따라 하게 되어 관부와 민간에서 행해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두(吏讀)를 이찰(吏札), 이서(吏書), 이도(吏道), 이토(吏吐), 이도(吏刀)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혹자는 이두의 차자표기에 있어 음차, 훈차 등을 말할 뿐, 음독과 훈독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음독과 훈독은 일본어에 해당하는 것이라, 우리말에 관련한 이두에 있어서 음차와 훈차 등만 생각하면 될 것이지, 음독과 훈독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두의 목적은 관리가 백성에게 글을 읽어주기 위한 것이다. 단순히 한자로 우리말의 어법을 표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음차, 훈차, 훈음차 등으로 표기한 이두 문장을 음독과 훈독으로 풀이하여 백성에게 읽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두이다. , 한 관리가 기록한 이두를 다른 관리나 자신이 읽을 때, 반드시 음독과 훈독이 필요하다. 어떤 문자이든지 간에, 문자는 적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읽기 위해 문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해 문자로 글을 적는 것이고, 읽는 사람이 그 문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말과 같다.

 

혹자는 음차, 훈차, 훈음차라는 용어 대신 음독자, 음가자, 훈독자, 훈가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같은 말을 어렵게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음독자는 그냥 한문이고, 음가자는 음차, 훈독자는 훈차, 훈가자는 훈음차이다.

 

서리가 이문으로 되어 있는 문장을 우리말로 풀이하여 백성에게 읽어주려면, 상당히 까다롭고 어렵다. 한문을 번역해 본 사람이라면 쉽게 동감할 것이다. 번역자 자신은 문장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하려면 문장을 다듬는 등의 행위가 따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두로 되어 있는 문장은 음독과 훈독만을 하면서 그대로 쭉 문장을 읽어나가면 되니, 따로 문장을 다듬을 필요가 없어서 이문 보다 훨씬 편하다. , 이두를 읽을 때는 반드시 음독과 훈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일본어에서 한자를 읽을 때 음독과 훈독을 따지는 것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알 수 있다. , 지금 일본어의 음독과 훈독은 일본식 이두이다. 최만리상소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두는 한반도에서만 시행된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에서도 시행되었다. 아니, 이두는 온 동방에서 시행된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말하면, 일본의 음독이니 훈독이니 하는 것들은 설총의 이두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말과 글에 하야 ()/ 동아일보, 1922.09.04. 기사(텍스트) <출처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글에態度

新羅薛聰의 지은 吏讀日本에 가서는 오날까지 日本文化原動力이 되어 그發揮功蹟가 말하자 아니하드라도 여러분이 다 아시는바이어니와 그것이 우리 朝鮮社會에 잇서서는~]

 

然皆假字而用假字글자를 빌리다가 아니라 자음을 빌리다라는 뜻이다. 단순히 한자를 빌려서 사용했다가 아니라, 가짜를 사용했다는, 즉 한자의 음이 아닌 어음의 표기로 사용했다는 뜻이다.

 

앞에서 의 차이를 설명했듯이, 여기 정인지서문의 는 모두 다 자음(字音)을 뜻한다. 조선시대 때 이두는 관부와 민간 모두에서 널리 사용되었는데, 그 이두는 자음을 사용하지만 한자의 음으로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음으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 가짜(假字)한자의 음을 빌려 어음에 사용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음의 수가 어음에 비해 매우 부족하여, 자음으로 어음을 표기하는 것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 어음은 예쁜, 이쁜, 개똥인데, 이두인 가짜(假字) 자음은 立分(입분), 伊分(이분), 介同(개동)’이므로, 어음과 가짜 자음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짜인 입분을 이쁜으로, 가짜인 이분을 이쁜으로, 가짜인 개동을 개똥으로, 다시 한 번 더 음을 바꾸어서 발음해야 한다. 가짜 자음으로 어음을 표기하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발음할 때에는 가짜 자음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음차인 경우에 그러한 것이고, 훈차나 훈음차인 경우는 더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정인지가 말하길 이두는 或澁或窒(혹은 껄끄럽고 혹은 막힌다)이라 한 것이다.

 

일상에서 흔하게 쓰이는 말인 진짜, 가짜의 그 가짜가 맞다. 국어사전에는 진짜(-), 가짜(-)’라고 실려 있어 그 어원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이는 국어학자들의 무능이고 나태이다. 혹자는, 조정(朝廷)이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는 과정에서, 보안상 서신에 또는 만 표기하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하다.

 

백성이 일상에서 흔하게 이두를 접하는데, 어떤 경우에 진음(眞音)이 아닌 가음(假音)을 써야 하는지, 이 글자는 진음인지 가음인지를 따져야 한다. , 어떤 문장이 있을 때, 한문 문장인가 이두 문장인가를 따져야 하고, 이두 문장이면 어떤 글자가 진음이고 어떤 글자가 가음인지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이두 문장을 읽을 수 있다. , 이 글자가 진짜(眞字)이냐 가짜(假字)이냐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상화 되어 지금의 진짜, 가짜가 된 것이다.

 

국어사전에는 진짜(-), 가짜(-)’라고 되어 있지만, 예전 신문을 조금만 뒤져보면 진짜(眞字), 가짜(假字)’로 쓰인 경우가 수두룩하다.

 

어느便眞字인지알게될것이다~’ 동아일보, 1952.01.16. 기사(뉴스)

‘~生日파레ㅣ드에도眞字스타린이죽엄의赤色廣場~’ 경향신문, 1952.01.15. 기사(가십)

‘~眞字內紛 卽 惡毒族屬들의~’ 경향신문, 1953.0310. 기사(가십)

‘~그가假字김일성인것이 판명될가바두려워한~~김일성이가 假字임은 이미천만전민족이~~假字眞字될리만무~~假字眞字~~眞假를막논하고 金日省이가~’ 동아일보, 1953.07.27. 기사(가십)

‘~九十九퍼센트는 假字로 모두내리양머리,검은머리을~~이들眞字 金髮孃들도~~現在 眞字金髮이나 어린애들은~’ 동아일보, 1938.10.01. 기사(뉴스)

 

非但鄙陋無稽而已鄙陋는 비언(鄙言)과 루언(陋言)이고, 그 뜻은 다만 (이두가) 비언과 루언(을 적는 것)이라 논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한문은 고상한 글이고, 이두는 介同(개동/개똥), 糞禮(분례/똥례), 路尾(노미/놈이) 등과 같이 비언과 루언을 적는 글이라, 이두는 저급하다고 여겼다.

 

최만리상소문에서도 역시 이두는 저급하다고 여겼지만, 이두가 비록 비어(鄙語)와 리어(俚語)이지만, 어느 정도 문자(한문)를 익혀야 이두를 쓸 수 있으므로, 이두는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이두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 이두가 문자를 사용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식한 사람은 이두가 비어를 쓰는 것이라 하여 이문으로 바꾸자고 할 정도인데, 문자를 사용하는 것도 아닌, 비어(鄙語)인 언어(諺語)를 표기하는 글자를 따로 시행하느냐며, 언문(훈민정음)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정인지서문도 최만리상소문처럼 문자는 고상하고 이두는 저급하다고 여겼는데, 상소문이 이두를 그나마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과는 다르게, 이두를 아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문자는 고상한 일에만 사용하고, 비루한 일에는 언문을 사용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 최만리는 문자를 비루한 일에도 사용하겠다는 것이고, 정인지는 문자를 고상한 일에만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바꿔 얘기하면, 최만리는 문자만 사용하겠다는 것이고, 정인지는 언문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최만리나 정인지나 당시 사람들 모두 다 문자를 고상하게 여겼으며, 한글전용이나 문자폐지 등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至於言語之間則不能達其萬一焉은 이두문을 음성언어로 사용하게 되었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한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을 자음으로 음독하면 문자(文字, 중국어)가 되지만, 한문과 음차와 훈차가 함께 섞여있는 이두문을, 문자처럼 자음으로 음독하였을 경우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게 된다. 관리가 이두문을 읽을 때에는, 한문 즉 한자단어는 자음으로 읽고, 음차는 어음으로 읽고, 훈차는 뜻으로 풀어 어음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두를 음성언어로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 이두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그러나, 한문 보다는 쉽다. 한문은 언어(諺語)로 번역을 해야 되지만, 이두는 번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음차와 훈차를 음독과 훈독을 통해 어음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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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 莫不該括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故智者不崇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以是解書, 可以知其義; 以是聽訟, 可以得其情字韻則淸濁之能卞,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唳雞鳴狗吠, 皆可得而書矣遂命詳加解釋, 以喩諸人於是, 臣與集賢殿應敎崔恒副校理朴彭年申叔舟修撰成三問敦寧注簿姜希顔行集賢殿副修撰李塏李善老等謹作諸解及例, 以敍其梗槪, 庶使觀者不師而自悟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恭惟我殿下天縱之聖, 制度施爲, 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而非人爲之私也?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蓋有待於今日也歟!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은 칠조(七調)129) 에 합하여 삼극(三極)130) 의 뜻과 이기(二氣)131) 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사용하여 구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마침내 해석을 상세히 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이해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이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 주부(敦寧府注簿) 강희안(姜希顔), 행 집현전 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 등이 능히 발휘할 수 없는 바이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써 제도와 시설(施設)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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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創制처음으로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 정음 28자를 만들었다가 아니라 정음 28자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세종이 28자를 발명하고 그 28자를 세종이 제정(制定)한 것인지, 이미 존재한 28자를 세종이 제정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라는 글자는 발명하다가 아니라 제정하다라는 뜻이다. 임금이나 조정(朝廷)의 행위는 항상 정치행위이기에, 발명한 것을 제정한 것이든 기존의 것을 제정한 것이든, 항상 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라는 글자를 근거로 세종이 한글을 발명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종이 발명한 것이냐는 따로 알아보아야 할 일이지, 創制라는 단어를 근거로 세종이 발명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혹자는 는 서로 통하는 글자라고 한다.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글자라고 한다. 그러나,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이자동의는 함부로 바꿔 쓸 수 없는 글자이다. 그렇게 주장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創製라는 단어는 없는 단어이다. 그런데, 지금 학계는 반대로 말하고 있다. 특정한 어떤 것을 존재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이라는 글자를 붙일 필요가 없다.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든, 이미 있는 것을 다시 만든 것이든, 부존재를 존재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부존재를 존재로 바꾸는 것이므로, 시작하다(비롯하다)라는 말을 붙여 그 기원(起源)을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제부터 계속 존재하게 하다라는 뜻으로서, 을 붙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만들다라고 하였을 때, 특정한 자동차의 개체를 만들다라는 뜻은 이고, 자동차라는 이데아(idea, ) 즉 자동차를 처음으로 만들다라는 뜻은 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상()을 만드는 것은 이고, 사물의 상에 따라 그 사물의 개체를 만드는 것을 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종이 한글을 발명했든 아니든, 처음으로 한글을 법제(法制)로 만들었으므로, 創制라고 하는 것이다.

 

의 실제 쓰임을 찾아보면 아래와 같다. , 대체로 는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것에 쓰이고, 는 일반적인 의미의 만들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制度 : 제정된 법규, 나라의 법칙, 국가나 사회의 구조 체제.

牽制 : 끌어 당기어 자유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함, 적을 자기 쪽에 유리한 지점으로 이끌어서 억누르고 자유 행동을 못 하게 방해함.

規制 : 규정에 따른 통제, 법이나 규정으로 제한하거나 금하는 것.

制限 : 정해진 한계, 한계를 정함, 어떤 개념에 새로운 내포를 가하여서 외연을 작게 하는 일.

制裁 : 법령이나 규칙 위반자에게 가하여지는 불이익 또는 징벌을 이름, 집단의 규율을 어겼을 때 가하여지는 심리적 물리적 압력, 또는 그러한 압력을 가하는 일.

强制 : 위력을 써서 남의 자유 의사를 누르고 무리하게 행함, 억지로 시킴.

制憲 : 헌법을 제정함.

法制 : 법률의 제도 또는 체제, 법률과 제도를 아울러 이르는 말, 법률로 정해진 여러 제도.

 

製品 : 원료를 써서 만들어 낸 물품, 원료를 가지고 물건을 만듦.

製作 : 재료를 가지고 물건을 만듦, 제술(製述), 영화 연극 방송의 프로 등을 맡은 사람이 협력하여 만듦.

製述 : 시나 글을 지음.

複製 : 그대로 본떠서 만듦.

精製 : 정성을 들여 잘 만듦, 조제품(粗製品)에 인공을 가하여 한층 좋은 물건으로 만듦.

製圖 : 기계 건축물 공작물 등의 도안이나 도면을 작성하는 일.

製法 : 물건을 제작하는 방법, 제조법.

法製 : 물건을 규정대로 만듦, 약의 성질을 좀 다르게 하기 위해 정해 있는 방법대로 가공하는 일, 약을 약방문대로 만듦.

 

앞에서 언급한 대로, 正音자음과 어음의 바른 음을 가리키는 말이고, 바꾸어서 말하면 자음과 어음의 바른 음을 표기할 수 있는 글자, 자음과 어음을 바르게 표기할 수 있는 글자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백성에게 자음과 어음의 바른 음을 가르치다, 백성에게 가르치는 자음과 어음의 바른 음이라는 뜻이 된다. , 훈민정음은 뜻을 표기하는 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음을 표기하는 글자, 요즘 말로는 표음문자를 뜻하는 말이다.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그 뜻은 많이 다르다. ‘내 뜻을 문자언어로써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뜻을 표기하는 문자가 아니라, ‘내 뜻을 음성언어로써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 음을 표기하는 문자가 된다. 한자는 뜻을 전달하는 음성언어이고, 우리말도 뜻을 전달하는 음성언어인데, 두 음성언어의 음을 표기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二十八字, 훈민정음은 28자인가 27자인가? 훈민정음과 언문은 같은 것인가?

 

수많은 사람이 한글에 대해 연구하지만, 한글에 대한 여러 의문을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한다. 아둔한 필자는 이렇게 알아냈는데, 똑똑한 사람들이 계속 헛다리만 짚는다. 사람들이 의문을 풀지 못하는 이유는 순수한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선입견과 의도를 가지고 사물을 대하기 때문에, 진실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아둔함은 아무 상관이 없고, 선입견과 의도를 버리고, 순수한 열정만을 가지고 사물을 대하면, 반드시 진실을 찾을 수 있다. 세종의 훈민정음서문과 최만리 등의 상소문과 정인지서문을, 옥편과 국어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직접 체험한 필자는 아무 의심이 없다. 필자가 밝혀낸 진실은, 단 하나만 제외하고 한글에 관한 모든 의문을 풀고 있다.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없이, 한글에 관한 모든 일이 하나로 통하고 있다.

 

언문을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것 하나만을 모를 뿐, 한글에 관한 모든 의문이 다 풀렸다.

1. 최소 고려 때부터 언문 27자가 한반도에서 아주 잘 사용되고 있었다.

2. 세종이 한반도의 언문 27자에 여린히읗을 추가하여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다.

3. 세종은 언문을 자음표기와 어음표기에 사용하도록 법제화 하였는데, 그것을 훈민정음이라 한다.

4. 어음표기는 관부에서 이두 대신 언문을 사용하는 것과, 한문서적을 언해하는 것이다.

5. 세종은 언문을 훈민정음으로 법제화 하는 것을 창안하였는데, 그것이 세종의 창제이다.

6. 세종의 지침을 바탕으로 훈민정음을 구체적으로 실행한 것이, 집현전의 훈민정음해례본이다.

7. 훈민정음은 중국인을 위해 만들었다.

8. 지금의 한글은 훈민정음이 아니라 언문이다.

9. 훈민정음으로 우리말(俚語)을 표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0. 훈민정음 언해본과 해례본에 실려 있는 우리말은,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말(方言)이다.

 

象形而字倣古篆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는가? 누구의 말대로 가림토를 모방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주류학계의 주장대로 한자 만드는 방식을 따랐다는 뜻인가?

 

먼저 象形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은 사물의 모양을 말하고 은 사물의 특징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형은 사물의 구체적인 모양이며 상은 사물의 추상적인 모양이다. , 형은 오감으로 쉽게 인식하는 사물의 외형적 모양을 말하며, 상은 형 속에 들어있는 사물의 특성을 말한다. 우리가 코끼리라고 할 때, 긴 코에서 시작하여 꼬리까지 전체적인 모양은 형이며, 코끼리의 특성인 긴 코 또는 긴 코와 펄럭이는 귀만을 간략히 상징화 하는 것을 상이라 하는 것이다. , 상형은 사물의 외형적 모양과 사물의 추상적 모양을 함께 뜻하는 단어이다. 마찬가지로, 오주연문장전산고(소학의 고금 이학에 대한 변증설)에서도 육서를 말하면서 상성(象聲)은 곧 형성(形聲)이라고 하였다. 굳이 구분하면 형은 구체적 모양을 말하고 상은 추상적 모양을 말하는 것이지만, 둘 다 사물의 모양을 뜻하기에 상성은 곧 형성이라 한 것이다. , 허와 공을 허공이라 하는 것처럼 상과 형을 상형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형은 말 그대로 사물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한중의 주류학계가 상형을 사물의 모양을 본뜨다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사물의 모양사물의 모양을 본뜨다는 전혀 다르다. 본뜨다로 해석하면 안 된다. 육서의 상형(畵成其物隨體詰屋)사물의 형에서 상을 추출하다라는 뜻이지 사물의 형을 본뜨다가 아니다. 만약 상형이자방고전의 상형을 주류학계의 주장대로 형을 본뜨다로 해석하면, 뒤에 오는 방고전과 중복이 된다. ‘사물의 형을 본떴다(六書象形 : 한자 만드는 방식)’라고 말했으면 그것으로 된 것이지, 다시 방고전(한자 만드는 방식을 본뜨다)’이라 하는 것은 말의 중복이 된다. 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글자는 한자 만드는 방식을 본뜬 것이다가 되어, 훈민정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육서의 상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되어, 문맥적으로 전혀 엉뚱한 말이 된다. , 학계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자해의 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之정음 이십팔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가 아니라, ‘정음 이십팔자의 각 상은 그 모양에서 (상을) 만들었다{=}’가 바른 해석이 된다. , 牙音象舌根閉喉之形아음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뜨다가 아니라, ‘아음 ㄱ의 상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이다, 아음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의 상이다가 올바른 해석이 된다. 脣音象口形순음 ㅁ의 상은 입모양이다, 순음 ㅁ은 입 모양의 상이다로 해석해야 한다. 풀이해서 설명하면 ㅁ이란 것은 입의 (사물의 모양)에서 나온 (글자의 모양)이다, ㅁ이란 것의 은 입의 에서 나왔다이다. , ‘ㅁ은 입의 모양에서 나온 모양이다, ㅁ의 모양은 입의 모양에서 나왔다가 되는 것이다. 다른 글자도 다 마찬가지이다.

 

주류학계는,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牙音象舌根閉喉之形... 등의 말이 있으므로, 세종이 인체의 발음기관을 본떠서 한글을 창제(創製)하였으며, 해례본은 그 증거이고, 해례본의 발견으로 한글의 제자원리를 비롯한 여러 의문이 풀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牙音象舌根閉喉之形... 등은 예의에 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자해에 실려 있다. 주류학계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세종이 직접 지은 것은 예의이고, 해례 부분은 집현전의 학사 8명이 지은 것이다. , 발음기관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말은, 세종이 말한 것인지 집현전의 학사들이 말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세종이 학사들에게 따로 제자원리를 가르쳐 주었고, 학사들이 그것을 제자해에 넣은 것일 수도 있지만, 학사들이 그럴싸하게 지어낸 것일 수도 있다. 예의는, 학사들이 해례를 만들 때, 예의를 기준으로 삼아 해례를 만들라는 지침이다. , 해례의 내용은 모두 다 학사들이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한글의 제자원리가 완전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다. 또한, 세종이 훈민정음을 발명한 것인지, 기존의 언문을 훈민정음으로 만든 것인지, 훈민정음 해례본만으로는 명백하지 않다.

 

는 앞에서 계속 설명했듯이 자음(字音)을 말한다.

 

古篆은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의 말대로 단군신전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대전이나 소전 등을 가리키는 것인가? 안타깝지만 이 정인지서문만을 가지고서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倣古篆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여러 서적을 살펴야 한다.

 

필자가 게으르기 때문에 모든 서적을 다 살필 수는 없다. 세종시대에서 먼 후대의 서적은 살피지 않고, 세종 당시의 서적만 살핀다. 사실, 세종 당시의 서적이 중요하지, 당시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먼 후대의 서적은 참고만 하면 될 것이다.

 

倣古篆이 등장하는 서적은 아래와 같이 세 곳이다. 현재 모든 사람이 방고전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이 세 곳을 말한다.

 

(1) 其字倣古篆 <세종실록 1443.12.30.>

(2) 字形雖倣古之篆文 <세종실록 최만리상소문 1444.02.20.>

(3) 象形而字倣古篆 <훈민정음 정인지서 1446.09.?., 세종실록 1446.09.29.>

 

그런데, (1)其字倣古篆이 기록된 세종실록의 기사는, 이미 여러 차례 필자의 글에서 설명했듯이, 144312월 당시에 작성됐던 사초(史草)를 바탕으로 하여 세종실록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세종실록을 만들었던 실록의 편찬자가 새로 집어넣은 것이 분명하다. , (1)의 실제 연도는 144312월이 아니라 1454(단종2)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대순으로 다시 배열하면 (2)가 제일 먼저이고 그 다음이 (3)이고, (1)이 제일 마지막이 된다. 세 곳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맥락상 자연스럽다.

 

세종과 정인지 등은 방고전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한자와 아무 관계없는 새 글자를 만드는 일에 있어, 새 글자를 만드는 방식이 한자를 만드는 방식과 어떤 연관이 있어야 한다고,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고 말할 근거가 전혀 없다. 최만리상소문에서도 분명하게 언문은 한자와 아무 관련이 없다 했고, 누가 보더라도 한자와 전혀 별개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이 명백한데, 굳이 새 글자가 한자와 연관이 있다고 말할 필요가 전혀 없다. 글자 만드는 방식이 같다는 이유로, 한자 외에 새 문자를 만드는 일이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일은,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며 정말 바보짓이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왜 새 문자를 만드는가에 대해 온 힘을 기울일 것이다. 실제로, 훈민정음서문이나 정인지서문 등에서는, 왜 정음 28자를 만들게 되었는가, 정음 28자를 사용하면 무엇이 좋은가에 대하여, 온 설명을 다하고 있다. 방고전이라는 말만 잠깐 등장할 뿐, 방고전이 무엇인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어떤 설명도 없다. , 정인지 등이 방고전이라는 말을 꺼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최만리 등이 상소문에서 방고전을 꺼내어 먼저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정인지 등이 그에 대한 반론으로 象形而字倣古篆其字倣古篆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3)정인지서문과 (1)실록에서는 방고전이라는 말만 언급될 뿐, 방고전이 무엇인가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말들은 없다. 그러나, (2)최만리상소문에서는 방고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말들이 앞뒤로 등장한다. 따라서, 사건의 시간상으로 따져도 그렇고, 최만리상소문의 (2)字形雖倣古之篆文이 무엇인지 알아내면, 정인지 등이 계속 주장하는 방고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 최만리상소문의 1항에서 字形雖倣古之篆文이 등장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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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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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조금 다듬으면, [혹시 언문은 모두 본래 옛 글자이고 새 글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셔도, 즉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용음과 합자는 모두 옛 것에 어긋나니 실로 근거가 없사옵니다.]가 될 것이다.

 

만약, 누구의 말대로 고전이 단군신전(가림토)을 말하는 것이라면, 글자의 모양은 옛 것이지만 글자의 용음과 합자는 옛 것이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것은, 최만리가 가림토의 모양을 알고 있었고, 가림토의 용음과 합자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세종 당시에 가림토를 아주 잘 쓰고 있었다는 말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아주 잘 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장되었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라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용음과 합자를 따지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사장되었던 것이므로 용음과 합자가 바뀔 수 있고, 새로 글자를 만드는 것이므로 모양만 본뜨고 용음과 합자는 본뜨지 않을 수 있다. 애초부터 용음과 합자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만리가 주장하는 바는, 가림토를 부활시키려면 용음과 합자도 옛 방식대로 부활시키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최만리는 언문을 반대한 것이지, 언문을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 세종 당시에 가림토가 아주 잘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용음과 합자에 대해 시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잘 쓰고 있는 가림토를 굳이 다시 언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더구나, 용음과 합자를 바꾸면서 까지 그렇게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그리고, 가림토를 언문으로 다시 만드는 것이라면, 최만리는 왜 그렇게 반대를 한 것일까? 용음과 합자가 달라졌으면 옛 것과 같게 하라고 말하면 될 일이지, 언문을 반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따라서, 고전은 단군신전(가림토)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류학계의 주장대로, 언문을 만드는 방식이 한자를 만드는 방식을 모방했다는 뜻인가?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새 글자를 만드는 방식이 한자를 만드는 방식을 모방해야 한다는, 그 어떤 근거도 없고, 한자 만드는 방식을 모방했다고 하여, 그 어떤 특별한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외국에서는 한자와 각자의 문자를 함께 사용하고 있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중국으로부터 어떤 비난이나 불이익을 받았다는 사례가 전혀 없다. 그리고, 한자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외국처럼 우리나라의 편의를 위해 한자와 언문을 함께 사용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이 왜 사대모화에 어긋나는 것이며, 왜 오랑캐라며 욕을 먹을 일인가에 대해, 학계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못한다.

 

동문동궤의 원전이 무엇인지 찾아보면, 그 뜻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중국의 문화를 따라하는 것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 따로 언문을 가지는 것이, 중국의 문화를 따라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다면, 조선의 모든 것이 중국의 것과 동일했는가? 조금만 생각하면 학계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따로 언문을 가진다고 하여 중국에게 비난을 받는 것인데, 언문을 만드는 방식이 한자의 방식을 따랐다고 하여 중국의 비난을 모면할 수 있는지,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가 언문을 만든다고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용음과 합자가 한자 만드는 방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지 설명할 수 있는가. 거짓말은 이제 그만하자. 고전은 한자를 만드는 방식이나 서체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만리상소문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후기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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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覽疏, 謂萬理等曰: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薜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汝等以薜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임금이 소()를 보고, 만리(萬理)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출처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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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상소문의 1항과 상소문의 후기를 함께 살펴보면, 자방고전의 고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상소문 1항에서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이라 하였는데, ‘古字(非新字)=古之篆文(古篆)’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 古篆新字에 대한 반대말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고전(古篆)은 특정하게 대전(大篆)이나 소전(小篆), 가림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한자 만드는 방식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굳어진 표준한자를 말하는 것이다. 약자(略字)나 속자(俗字), 신자(新字)가 아닌 표준한자 또는 기준한자를 말하는 것이다. , 고전은 대전도 될 수 있고 소전도 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설문해자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대전 또는 소전이라는 서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전 또는 소전이라는 문자 체계에 들어있는 낱낱의 글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소문의 1항에서 則字形雖倣古之篆文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라 하였는데, 상소문의 후기에서 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薜聰吏讀亦非異音乎라 하였고, 이어서 且汝知韻書乎四聲七音字母有幾乎若非予正其韻書則伊誰正之乎라 하였는데, 자형(字形)과 용음과 합자는 모두 다 운서(韻書)에 대한 얘기이다. 따라서, 고전(古篆)은 한자(漢字)의 고자(古字), 즉 표준한자를 말하는 것이 명백하다. 물론, 이기에 단순히 모양과 뜻을 모두 포함한 한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字音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만리 등은 (소리)가 아니라 字形(모양)이라 한 것이며, 정인지는 象形(모양)(소리)를 함께 말했고, 실록은 其字(그 소리)라 한 것이다. 따라서, 은 모양과 소리를 함께 포함한 한자를 말하는 것이고, 는 한자의 소리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서에 있어서 표준한자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표준한자는 한자의 발음기호로 쓰일 수 있는 한자들을 말한다. 한자의 발음기호로 쓰일 수 있는 한자는, 오래 되고 널리 퍼져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한자를 말한다. 그런데, 세종 이전에는 견() () () () ... 등이 운서의 발음기호로 쓰였는데, 세종이 군() () () () ... 등으로 바꿔버렸고, ‘자모+운모+성조의 합자를 초성+중성+종성+성조의 합자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 의 반절식 발음표기는 德紅切로서, 실제로 발음할 때에는 ////을 빠르게 이어서 발음하여, //에 가까운 ////의 중간 발음이 되지만, 세종은 //////을 합하여 //으로 발음하게끔 바꿔버린 것이다. 용음 즉 발음이 변하였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설명하면, 세종 이전의 반절에서는 /+/ => //로 발음했는데, 세종이 /+/ => //로 바꿔버려서, 한자의 발음이 //에서 //로 변했다는 뜻이다. 상소문의 1항은 이것을 시비하는 것이다.

 

상소문 후기를 보면, 최만리 등이 상소문으로 시비한 것에 대해, 강하게 호통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등의 방법으로, 세종은 나름대로 잘 방어를 하였다. 그러나, 용음이 변한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반론하지 못하였다. 합자에 대한 견해, 동문동궤를 깨뜨리게 된 이유, 이두를 대신하여 언문을 사용하는 이유, 급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과 동궁을 참여하게 한 것 등은, 나름의 명분이 있어서 강하게 밀어 붙일 수 있었지만, 용음에 대한 문제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훈민정음이 반포될 때에는,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문제가 계속 콤플렉스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 방고전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정인지서문에서도 다른 문제는 나름 잘 반론하고 있지만, 이 용음에 대해서는 象形古篆하였다라고 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방고전(倣古篆)은 세종의 언문운서가 기존의 운서 만드는 방식을 모방했다라는 뜻이다. ,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한자의 발음이 기존의 자음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則字形雖倣古之篆文(언문운서의 발음기호로 사용하는) 한자의 모양은 비록 기존의 한자를 모방하였을지라도가 되고, 象形而字倣古篆‘(언문운서의 발음기호로 사용하는) 한자의 모양(象形)과 한자의 음()은 기존의 한자를 모방했다가 되고, 其字倣古篆‘(언문운서의 발음기호로 사용하는) 그 한자의 음은 기존의 한자를 모방했다가 되는 것이다. , 기존의 반절에서 훈민정음으로 바꿨지만, 한자의 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고전(倣古篆)을 근거로 가림토를 주장하거나, 방고전을 근거로 제자원리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상소문에서 諺文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만, 언문이라는 단어가 ㄱㄴㄷㄹ...’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특히 상소문의 1항에 등장하는 언문이라는 단어는, 언문을 발음기호로 사용한 언문운서의 언문한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운서의 핵심은 한자의 발음이다. 그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데에 사용된 것이 언문이므로, 언문운서 또는 언문한자를 그냥 언문이라 말하는 것이다. 언문한자는 언문이면서 동시에 한자인 것을 뜻한다.

 

因聲而音叶七調三極之義二氣之妙莫不該括은 상형이자방고전의 바로 뒤에 오는데, ‘소리에 따른 음은 칠조에 맞고, 삼극의 뜻과 이기의 묘함을 담고 있지 않음이 없어라고 번역되어, 앞부분과 함께 해석하면 ‘(발음기호인) 언문한자의 모양과 음이 고전을 모방하여서 천지자연의 소리에 따른 음은 칠조에 맞고 삼극의 뜻과~’가 된다.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28자 즉 훈민정음 28자는, ㄱㄴㄷㄹ...을 말함과 동시에 君那斗閭...를 함께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언문이라 하면 ㄱㄴㄷㄹ...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당시 한자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언문은, 자음과 어음의 음을 함께 표기할 수 있는 발음기호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ㄱㄴㄷㄹ...의 발음을 익히기 위해서는 君那斗閭...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 우리의 눈에는 ㄱㄴㄷㄹ...만 보이지만, 한자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君那斗閭...도 함께 동시에 보이는 것이다. , 세종과 정인지, 최만리 등이 언문이라 말할 때, 그들은 두 가지를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즉자형수방고지전문, 상형이자방고전, 기자방고전 등의 君那斗閭...와 ㄱㄴㄷㄹ...을 함께 뜻하는 것이고, 은 그냥 한자를 뜻하는 것이다.

 

28자로써 轉換無窮하다는 말은, 28자로써 조합 가능한 글자 수가 매우 많다, 무수히 많다는 뜻이다. 뒤에 오는 簡而要精而通과 연결되는 말로서, 글자 수가 매우 많아서 배우기 어렵고 익히기 어려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簡而要精而通故智者不崇朝而會愚者可浹旬而學은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이 어떠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簡而要간단히 할 수 있다는 뜻인데, 구하다 원하다 바라다 잡다 얻다 중요하다 요점 골자 등의 뜻을 가진 글자로서, 여기에서 요점을 익히다, 핵심을 얻다의 뜻이다. , 簡而要간단히 익히다, 간단히 배우다. 쉽게 배우다라는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알맞다. 그렇게 번역하면, 바로 뒤에 오는 故智者不崇朝而會愚者可浹旬而學과 아주 자연스럽게 문맥이 연결된다. 마찬가지로, 精而通정밀하게 통달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맞다. 쉽게 배우고 깊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똑똑한 자는 2~3 시간 안에 익히고() 우둔한 자는 열흘 안에 배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그렇게 번역해야만, 앞에 오는 轉換無窮과 뒤에 오는 故智者不崇朝而會愚者可浹旬而學과 문맥적으로 완벽히 연결된다. 풀어서 말하면, (한자는 글자 수가 무수히 많아서 배우기 어렵고 통달하기 어려운데) 훈민정음은 28자로써 조합 가능한 글자 수가 무수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배우기 쉽고 깊게 익힐 수 있어서, 지혜로운 자는 아침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자는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는 뜻이다.

 

以是解書可以知其義以是聽訟可以得其情은 훈민정음의 목적 중에 하나인 어음표기를 말하는 것인데, 정음을 한문서적의 언해에 사용하는 것과, 이두를 대체하여 정음을 옥사 등의 공문서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解書는 언해(諺解)를 말하는 것이다.

 

字韻則淸濁之能卞은 자운 즉 청탁의 분별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훈민정음의 목적 중에 하나인 자음표기를 말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문가는 항상 그 분야의 사물을 분별하여 용어를 새로 만들고, 또 혼용한다. 그런데, 연속성이 단절되었을 때 즉 후학이 선대의 결과물을 정리할 때, 자주 고생을 한다. 성운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요즘 사람이 혼동하는 것 중에 하나를 정리하면, 자음(字音)에서 자모(字母)는 성모(聲母)이며 자음(子音)으로써 칠음(七音)이고, 자음(字音)에서 자운(字韻)은 운모(韻母)이며 모음(母音)으로써 청탁(淸濁)이고 사성(四聲)이다. 마찬가지로, 어음(語音)에서도 청탁은 모음 즉 종성(終聲)에 관한 얘기로서, 자음(子音)이나 초성(初聲)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혹자는 자음(子音)의 청탁을 말하는데, 청탁은 운모 즉 종성에 관한 문제이다. 유성음이니 무성음이니, 된소리니 거센소리니 하는데,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청탁은 모음(중성)+자음(종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종성으로 사용될 때의 자음을 말하는 것이다. , 초성의 자음에서 청탁을 논하거나, 자음 자체에서 청탁을 논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종성에서 칠음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다.

 

자음(字音) 또는 어음(語音)의 구조는 자모+자운, 자모+운모+성조가 기존의 합자이고, ‘자모(초성)+자운(중성+종성+성조), 자모(초성)+운모(중성+종성)+성조가 훈민정음의 합자이다. 성운학에 있어서 대체로 文字===字音==字韻으로 쓰이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엄격히 구별하여 쓰기도 한다.

 

樂歌則律呂之克諧는 악가 즉 율려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악기의 소리와 노래 가사의 소리가 조화를 잘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훈민정음의 기본적인 목적은 자음과 어음의 표기이고, 노래 가사도 자음 또는 어음이기도 하므로, 노래 가사의 표기에 대하여 반드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장점이나 활용도를 자랑할 필요가 있기에, 노래 가사의 표기에 대해 굳이 언급한 것이다.

 

無所用而不備無所往而不達은 훈민정음의 장점과 활용도를 포괄적으로 자랑하는 것인데, 기본적인 목적인 어음과 자음의 표기, 악가의 표기 등을 제외하고도, 잠재적인 활용도가 매우 넓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정음으로 표기하면, 청탁의 능변과 율려의 극해가 넘치지 않고 딱 맞아서, 자연의 소리()도 표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雖風聲鶴唳雞鳴狗吠皆可得而書矣는 훈민정음의 잠재적인 활용도가 매우 넓다는 것을, 과장하여 예를 든 것이다. 통지(通志 七音略 序)에도 등장하는 얘기로서, 역대로 동국과 중국은 항상 표음에 대하여 관심이 컸는데, 다만 세종 이전에는 자음을 빌려서 표기하는 것이다.

 

언문 27자는 리어를 표기하기 위한 글자로서 한반도에서만 쓰였기 때문에, 훈민정음 보다 표음에 있어 많이 부족하다. 언문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훈민정음은, 여린히읗을 비롯하여 순경음 표기법과 정치음, 치두음을 표기하는 방법까지 추가하였기에, 표음에 있어 언문 보다 더 유리하다.

 

혹자는, 일제 강점기의 한글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망쳐서 지금의 한글로 만든 것이라며, 표음에 있어 한글이 훈민정음 보다 많이 부족해졌다며 비판한다. 그러나, 사실은 한글학자가 훈민정음을 망쳐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지금의 한글은 언문 27자를 바탕으로 하여 만든 것이지, 훈민정음 28자를 바탕으로 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 , 훈민정음은 중국에서 쓰였고, 여기 한반도에서는 훈민정음이 아니라 언문이 쓰였다. 일제 강점기의 한글학자들은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의 한글이 만들어졌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 한반도에서 계속 쓰였던 언문을 바탕으로 하여 한글을 만들었기에, 표음에 있어 지금의 한글이 훈민정음 보다 부족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언문은 리어를 표기하기 위한 글자였고, 훈민정음은 리어뿐만 아니라 자음과 방언까지 표기하기 위한 글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리어의 발음이 변한 것도 있고, 한글학자들이 아래아 등을 없앤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리어표기에 훈민정음이 아니라 언문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설령, 훈민정음을 동국에 시행하였다 하더라도, 동국인은 훈민정음 28자와 언문 27자를 구별할 필요도 없었고, 구별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여린히읗은 자음(字音)에만 사용되었고, 자음도 동음과 화음으로 구분되었고, 순경음이나 정치음, 치두음은 모두 중국의 방언이나 자음에 사용한 것이기에, 동국인은 언문 27자만 사용해도 어음과 자음 표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만약 중종 이후로도 중국의 자음 표기에 훈민정음이 계속 사용되었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나라의 한자음에 훈민정음이 사용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자음 즉 중국어는 동방의 공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민정음 즉 언문은 연산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동국에서만 언문이 계속 사용되다가 국문으로 바뀌고 한글로 바뀐 것이기에, 지금의 한글은 훈민정음이 아니라 언문이다.

 

遂命詳加解釋以喩諸人드디어 명을 내려 해석을 상세히 더하여 사람들을 깨우치게 하시니라는 뜻이다.

 

謹作諸解及例以敍其梗槪庶使觀者不師而自悟삼가 모든 해와 례를 제작하여 그 대략(梗槪)을 펼쳐서, 대체로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이 스스로 깨닫게 한다라는 뜻이다.

 

사실, 세종이 한글을 순수하게 창제(創製)한 것이 맞다면, 글자의 상()이 어디에서 기인(起因)하는지, 음양과 오행의 이치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초성과 종성과 중성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적용하는지, 합자는 어떻게 하는지 등, 해례의 내용을 세종이 직접 저술했어야 한다. 직접 글자를 만든 사람이 그 글자에 대해 제일 잘 아는 것이고, 당사자가 직접 풀이를 해야 제일 잘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예의만을 제시하였고, 예의를 바탕으로 하여 말 만들기를 통해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고, 문자로서의 기능을 실제로 적용시킨 것은 집현전의 학사들이다. 그렇다면, 한글을 세종이 직접 발명한 것이 맞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어떤 분야에서든 마찬가지로서, 매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의문이다.

 

갑이 어떤 분야에서 어떤 학설을 처음으로 들고 나왔다면, 그 학설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갑 본인이다. 물론, 다른 사람 을이 그 학설을 바탕으로 하여 확대 생산한 것이 있다면, 확대 생산된 부분에 대해서는 을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처음 주장된 내용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처음 주장한 갑이며, 백번 양보하여 처음 주장된 내용에 대해서도 을이 더 잘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처음 주장에 대하여 설명하는 사람은 갑이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세종이 28자를 직접 다 만들었고, 28자로써 합자하는 방식을 직접 만들었다면, 스스로의 업적을 위해서도, 스스로의 정당성을 위해서도, 자신이 직접 해례를 저술했어야 했다.

 

세종이 직접 창제한 것이 맞다면, 144312월에 이미 제자해나 합자해 등은 세종의 머리 속에 들어 있었어야 한다. , 예의에 제자해나 합자해의 내용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직접 만든 사람은 몇 마디 예를 보여주고 나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나머지는 니들이 알아서 해.’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은 제자해를 비롯하여 합자해 등을 지었다. 또한, 세종이 혼자서 다 만들었다면, 그것을 그럴싸하게 보이도록 말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학사들은 말 만들기를 2년이 넘게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해례본을 근거로 하여, 세종이 한글을 순수하게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학계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근거로 세종이 한글을 창제(創製)한 것이 맞다고 주장하지만, 오히려 해례본은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세종이나 학사들은 이미 언문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세종이 언문을 창제(創制)하면서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고, 학사들은 그에 따라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2년이 넘게 걸린 이유는, 리어 표기에 사용하던 언문을 훈민정음으로 만들어, 자음 표기에 사용하기 위해서 그러한 것이다. , 동국의 어음 표기에 사용하던 언문을, 중국의 어음과 자음의 표기에 사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이다.

 

정인지서문만 살피면, 훈민정음의 주목적은 어음표기에 있고, 자음표기는 부수적인 목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종의 훈민정음서문과 최만리상소문, 동국정운과 홍무정운역훈 등을 살피면, 자음표기는 부수적인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어음표기 보다 더 공을 들이고 있다. 애초에 동국의 어음과 자음을 표기하기 위해 한글을 발명한 것이라면, 자음 표기에 너무 공을 들여서 별 쓸모도 없는 여린히읗을 굳이 발명한 이유, 순경음을 표기하는 자음을 발명하지 않고 순경음 표기법을 만든 이유, 치두음과 정치음의 표기법을 나중에 추가한 이유 등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표음문자를 발명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 결벽증에 걸린 듯이 자음 전용으로 여린히읗을 만들었고, 그랬으면서도 순경음을 표기하는 글자는 따로 만들지 않았고, 나중에 따로 치두음과 정치음 표기법을 추가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 세종이 한글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언문을 자음표기에 이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자음표기에만 그렇게 공을 들일 수 있었던 것이며, 따로 글자(子音)를 만들지 않고 순경음 표기법, 치두음과 정치음 표기법을 추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이와 같은 그 연원의 정밀한 뜻의 묘는 신 등이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는 뜻이다.

 

恭惟我殿下天縱之聖制度施爲超越百王正音之作無所祖述而成於自然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而非人爲之私也夫東方有國不爲不久而開物成務之大智蓋有待於今日也歟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서 제도 시행이 백 명의 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도화는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으로 된 것이 아니다.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라는 뜻이다.

 

임금 띄워주기의 전형이다. 그런데, 모순이 있다. 정인지 등은 精義之妙라서 자신들은 발휘할 수 없다면서, 임금이 아닌 자신들이 해례를 지었다. 너무나 훌륭한 임금이 너무나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하면서도, 임금이 한 일은 예의뿐이고 학사들이 해례를 지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라는 구절은 더 아리송하다. 한글을 발명했으니, 전대의 것을 본받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굳이 왜 언급하는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러한 모순들이 생기는 이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발명한 것이라는 전제하에서는 여러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다. 훈민정음 이전의 언문을 전제로 하면 모든 의문이 다 풀린다.

 

세종의 훈민정음은 創製인가 創制인가? 세종은 훈민정음을 발명한 것인가, 아니면 언문을 법제화한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세종실록만 살펴도 확실히 알 수 있지만, 여기에서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세종실록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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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02, 세종 251230일 경술 2번째 기사}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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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알기로는, 한글과 관련한 여러 고전에서, 언문과 훈민정음을 함께 언급한 곳은 실록의 이 기사뿐이다. 언문만 언급하거나 훈민정음만을 언급할 뿐이지, 한 문장에서 언문이라는 단어와 훈민정음이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는 것은, 정말로 매우 특별한 일이다.

 

이 기사는 언문과 훈민정음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잘 가르쳐주고 있다. , 가만히 들여다보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하였는데라고 하였는데, 학계의 해석대로 언문 28자를 발명한 것이라면, 뒤 부분의 是謂訓民正音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언문 28를 발명했으면 문자의 이름은 언문이다. 그것을 다시 훈민정음이라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혹자는, ‘언문을 ㄱㄴㄷㄹ...의 이름이 아니라 상스런 말을 표기하기 위한 문자로 해석하여, ‘상스런 말을 표기하기 위한 28자를 발명했는데 이 글자의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한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凡于文字及本國俚語皆可得而書라고 하여, 훈민정음의 목적이 한자의 발음표기와 본국의 리어표기 즉, 훈민정음의 목적이 두 가지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본국의 리어표기만을 언급하였다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맞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文字를 언급하였고, 더구나 ~~(~에서 ~까지)’이라 하여, 리어표기 보다는 한자의 발음표기에 비중이 더 실려 있다. 문자의 발음표기에 사용하는 것은, 상스런 말을 표기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언문상스런 말을 표기하기 위한 문자라고 해석하면 안 되고, 28자의 원래 이름이 언문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언문이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상스런 말을 표기하는 문자라는 뜻이지만, ‘언문 28언문이라는 이름의 문자 28로 해석하는 것과 상스런 말을 표기하는 문자 28로 해석하는 것은 천지차이이다. 실제로 최만리상소문을 비롯하여 ㄱㄴㄷㄹ...을 언문이라 호칭한 경우가 부지기수로써, 언문이라는 단어가 문자의 이름으로 쓰였음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므로 언문 28자를 상스런 말을 표기하는 문자 28로 풀어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한글의 원래 이름이 언문이었음이 분명하다.

 

,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본국의 리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라고 하였는데, 문자표기와 리어표기에 사용하기 위한 새 문자를 훈민정음이라 한다는 뜻이다. , 리어표기에만 사용되던 언문 28자를 제도화하여, 문자표기와 리어표기에 사용하는 것을 훈민정음이라 한다는 뜻이다. , 가 아니라 制度化라는 뜻이다. 따라서, ㄱㄴㄷㄹ...의 원래 이름은 언문이고, 문자표기에도 사용함으로써 훈민정음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의 字雖簡要轉換無窮자는 비록 간단히 익힐 수 있지만 전환하는 것은 무궁하다, 글자는 비록 쉽게 익힐 수 있지만 조합하는 것은 끝이 없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도 의 뜻은 익히다, 배우다로 쓰였다. 정인지서문에서는 글자 수가 무수히 많아서 배우기 어려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간단히 익힐 수 있다라는 뜻으로 말하였고, 실록에서는 같은 뜻의 말을 반대로 바꾸어서 간단히 익힐 수 있지만 조합하는 글자 수는 무수히 많다라고 말하였다.}

 

여기 정인지서문에서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我殿下天縱之聖制度施爲超越百王正音之作無所祖述而成於自然(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으로써 제도와 시설이 백대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에서 制度施爲제도와 시설이라 번역하였는데, 올바른 번역은 제도를 시행하다이다. 국어사전 등을 찾아보면 施爲의 뜻은 어떤 일을 베풀어 이룸이라 되어있다. , 백왕을 백대의 제왕이라 번역하였는데, 백왕은 백 명의 왕, 보통의 왕 백 명을 합친 것을 말한다. 백대의 제왕이라 번역하면, 자신의 조상을 포함한 선대 백 명의 왕보다 더 뛰어나다는 말이 되어, 불경스러운 표현이 된다. , ‘백왕을 초월하다백 명의 왕을 합친 것보다 뛰어나다, 보통의 왕 보다 백배나 뛰어나다는 뜻이다. 따라서, 制度施爲超越百王正音之作無所祖述제도 시행이 백 명의 왕보다 뛰어나시어(제도를 시행하는 능력이 백배나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도화는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가 없이라는 뜻이 된다.

 

풀어서 말하면, 임금은 치자(治者)이고 치자의 책무는 제도를 시행하여 꽃피우는 것인데, 세종의 제도를 시행하는 능력은 백 명의 왕을 뛰어넘는 실력이라서, 세종이 정음을 지은() 것은 앞 시대의 제도를 본받지 않은 것이라고, 정인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명백하게, 여기의 제도를 시행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하기 때문에, 최만리가 諺文制作至爲神妙創物運智夐出千古(언문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라고 하였고, 創作諺文(창작하신 언문은)이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정인지도 여기 정인지서문에서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어)라고 하였다. 모두 다 말하길, 세종의 훈민정음은 옛것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지금 만들어낸 새것이라 말하고 있다. , 옛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든 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삐고 양심에 털 난 자들아, 똑똑히 보라. 制度施爲超越百王正音之作無所祖述이라는 문장에서 制度施爲超越百王(A)正音之作無所祖述(B)은 별개의 두 얘기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A라서 B이다, A라서 B를 했다, A이기에 B이다, A이기 때문에 B이다라는 얘기이다. , ‘제도를 시행하는 능력이 백왕을 초월하기에, 정음의 제도화()는 선대의 것을 본받지 않고라고 하여서, 正音之作制度施爲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풀어서 설명하면, (옛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 제도를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우리 임금은 제도를 시행하는 능력이 보통의 왕보다 백배나 뛰어나기 때문에, 이번 정음의 제도화는 옛것을 본받지 않고도 시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옛것을 본받지 않았다고 시비 걸지 말라), 라는 뜻이다.

 

누가 보더라도, 문맥적으로 制度施爲를 뜻하는 것이 명확하다. 그대들이 번역해 놓은 것에서도 제도와 시설이 백대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여기 정인지서문에서 正音之作은 명백하게 제도화(制度化)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대들은 이 만들다()라는 뜻이라며 거짓말을 하지만, 創作, 創制, 制作 등은 모두 다 제도화, 법제화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 세종이 언문(훈민정음)을 창제, 창작, 제작하였다는 것은, 한글을 발명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한글을 제도화하였다는 뜻이다. 옛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낸 제도가 아니라, 처음으로 만들어낸 새 제도라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이 혼란을 겪고 있는데, 그렇게 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나, 그렇게 된 책임은 엄연히 그대들 학자에게 있다. 양심껏 하였지만 능력부족으로 그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하겠지만, 그대들 대부분은 고의로 그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혼란한 이유는, 한 곳에서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작, 창제하였다고 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훈민정음이 자방고전을 하였다고 하니, 두 개가 서로 모순으로 보여 혼란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둘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둘은 서로 전혀 다른, 별개의 얘기이다. 훈민정음의 창작, 창제는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였다는 뜻이고, 자방고전은 훈민정음으로 만든 운서의 자음이 기존의 자음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작, 창제, 자방고전 등을 내세워서, 세종이 한글을 발명했느니, 한글은 가림토를 모방한 것이니 등의 주장은, 모두 다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이 한글을 발명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등을 알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답은 간단하다. 한글과 관련한 여러 고전을 자세히 살피면 된다. 그 중에, 가장 최초라 할 수 있는 기록이면서 가장 많은 내용이 담겨있는, 최만리상소문만 제대로 해석하면 한글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 있다. 그 외에 훈민정음서문, 정인지서문, 동국정운서문, 홍무정운역훈서문, 사성통고범례, 훈몽자회범례 등을 참고하면, 최만리상소문의 내용을 재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이, 형식상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 144312월의 기사이지만, 내용이 있는 실제적인 기록은 최만리상소문(1444.02.20)이 가장 최초의 기록이고, 세종실록의 기사는 1454년의 기록으로서 사성통고 보다 더 늦다. 1444216일의 기사는 별 내용이 없는데다 최만리상소문과 연관되는 내용이라, 한글과 관련하여 내용이 있는 기록은 최만리상소문이 최초라 할 수 있다.}

 

정인지서문 즉 훈민정음 해례본만 갖고서는, 세종이 한글을 발명했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이것을 명확하게 알고 싶다면 최만리상소문을 읽으면 된다. 추가로 훈몽자회를 살피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아무튼, 최만리상소문을 비롯하여 훈민정음서문부터 훈몽자회까지 모두 살펴서, 한글과 관련하여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추정이 아니라 사실(fact)이다.

 

1. 훈민정음은 말 그대로 표음문자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이라는 말의 뜻은 백성에게 가르치는(訓民) 자음과 어음을 바르게 표기할 수 있는 음(正音)’이다. 이나 라 하지 않고 이라 한 이유는, ㄱㄴㄷㄹ...은 뜻을 전달하는 글자가 아니며, 뜻을 전달하는 글자인 한자의 음을 표기하고, 뜻을 전달하는 어음의 음을 표기하기 때문이다.

 

2.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있었다. 최소 고려 때부터 있었던 언문 27자는, 세종 당시에 한반도에서 아주 잘 사용되고 있었다. 언문 27자에 여린히읗을 추가하여 28자로 만들고, 순경음 표기법을 추가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나중에, 치두음과 정치음을 표기하는 방법을 추가하였다.

 

3. 훈민정음은 중국인을 위해 만들었다. 세종은 한반도의 언문 27자를 이용하여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고, 그 훈민정음을 중국에 반포했다. 훈민정음 해례본뿐만 아니라 언해본도 중국에 내려 보냈다.

 

4. 해례본과 언해본에 실려 있는 중세의 우리말은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말이다. 자음은 동방의 공용어로서 인공어인 중국어를 말하는 것이고, 어음은 동방의 자연어인 언어(諺語)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중국어는 백화문으로서 세종 당시의 중국어와 많은 차이가 있다.

 

5. 중국에는 중국어(文字)와 중국말(方言)이 있었다. 중국어는 자음이고 중국말은 어음이다. 우리말과 중국말은 원래 같은 언어였는데, 후대에 달라진 것이다. 중세의 여러 기록에 실려 있는, 현대의 우리말과 많이 다른 중세의 우리말은,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말일 가능성이 높다. 기록물이 동국인을 위해 만든 것인지 중국인을 위해 만든 것인지, 그것부터 먼저 따져야 한다.

 

夫東方有國不爲不久而開物成務之大智蓋有待於今日也歟(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에서도,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문자의 발명이 아니라 제도의 시행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오랫동안 한자를 쓰면서도 그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 불편함을 없애는 지혜가 오늘날에 발휘되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어음표기에 이두를 사용하는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것을 없애는 지혜가 오늘날에 발휘되었다는 뜻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문자의 발명이 아니라 제도의 시행에 대한 얘기라는 것이다. 매우 훌륭한 새 문자를 발명했기 때문에 큰 지혜가 발휘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의 발음표기와 학서자, 치옥자의 어려움을 없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제 훈민정음서문과 최만리상소문에 이어 정인지서문도 해석을 마쳤다. 5년 전에 최만리상소문을 해석하면서 덤으로 이 정인지서문을 대충 해석하였는데, 그래서 억지가 있었고 몇 가지 작은 오류가 있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필자는 큰 반성을 하였다. 정성이 없이 대충 하는 일은, 그 결과가 어떠한지 분명하게 다시 깨달았다. 능력이라도 출중하면 모를까, 능력이 부족한 자가 정성도 없으면 그 결과는 뻔하다.

 

아무튼, 정인지서문의 해석을 마치면서 반성하는 것은 이러하다. 이 정인지서문을 제대로 읽지 않고서, 훈민정음의 정음에 대하여 섣불리 판단한 잘못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음을 한자의 정음이라고만 믿어, 훈민정음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잘못 해석한 것이다. 언문정책의 목적은 세 가지이고 그 중에 하나가 훈민정음이라 하였는데, 이것 하나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바르다. 바로 잡으면, 언문정책 즉 훈민정음의 목적은 세 가지이다.

 

정인지서문의 핵심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는 서로 다른 개념이고, 자방고전은 운서와 관련된 말이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말은 훈민정음을 제도화하였다는 뜻이다.

 

이제, 한글에 관한 모든 것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훈민정음의 목적은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써, 자음표기와 어음표기이고, 작게 나누면 세 가지로써, 자음표기와 이두를 대체하는 것과 언해에 있다. , 훈민정음 28자는 동국의 언문 27자에 여린히읗을 추가하여 만든 것이며, 동국에서 만든 훈민정음은 중국인을 위해 만든 것이다. 이것이 한글에 관한 모든 것이다.

 

필자의 글을 읽는 독자는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그럴 수도 있고, 진실의 문을 넘어갈 때 느끼는 떨림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필자의 글을 건성으로 읽지 말고, 필자가 내세우는 근거가 사실(fact)인지 아닌지를, 반드시 먼저 따지고 나서, 필자의 글을 평가해야 한다.

 

동국과 중국은 하나였다. 이것이 동국사 복원의 핵심이다. 동국인과 중국인이 하나라는 뜻이 아니다. 인류가 하나일뿐, 모든 인류는 개체로서 전체를 이룰 뿐이다. 개체로서 존재하는 각 지역의 사람들을, 민족이라는 틀에 가두면 안 된다. 혈연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동국사 복원은 절대 이룰 수 없다. 동국의 역사는 세계사이며 인류사이기 때문이다.

 

지금 동국의 법통은 완전히 끝이 났다. 이제 와서 동국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더구나 동국을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또 부활시킬 필요도 없다 할 것이다. 많이 부족하지만 UN이 있고, 그것이 아니라도 대체할 무엇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국의 역사가 복원되면, 동국사는 인류의 행복과 번영을 위해 아주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인류가 동국사를 통해 반성을 한다면, 동국사는 진리를 찾는 여정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는 예수와 다윈을 죽이는 싸움에 기꺼이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것이 인류의 운명이고 숙명이다.

 

禮曹判書鄭麟趾序曰:

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所以古人因聲制字, 以通萬物之情, 以載三才之道, 而後世不能易也然四方風土區別, 聲氣亦隨而異焉蓋外國之語, 有其聲而無其字, 假中國之字, 以通其用, 是猶柄鑿之鉏鋙也, 豈能達而無礙乎? 要皆各隨所處而安, 不可强之使同也吾東方禮樂文物, 侔擬華夏, 但方言俚語, 不與之同, 學書者患其旨趣之難曉, 治獄者病其曲折之難通昔新羅 薛聰始作吏讀, 官府民間, 至今行之, 然皆假字而用, 或澁或窒, 非但鄙陋無稽而已, 至於言語之間, 則不能達其萬一焉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 莫不該括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故智者不崇朝而會, 愚者可浹旬而學以是解書, 可以知其義; 以是聽訟, 可以得其情字韻則淸濁之能卞, 樂歌則律呂之克諧, 無所用而不備無所往而不達, 雖風聲鶴唳雞鳴狗吠, 皆可得而書矣遂命詳加解釋, 以喩諸人於是, 臣與集賢殿應敎崔恒副校理朴彭年申叔舟修撰成三問敦寧注簿姜希顔行集賢殿副修撰李塏李善老等謹作諸解及例, 以敍其梗槪, 庶使觀者不師而自悟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恭惟我殿下天縱之聖, 制度施爲, 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以其至理之無所不在而非人爲之私也? 夫東方有國, 不爲不久, 而開物成務之大智, 蓋有待於今日也歟!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에,

천지자연의 성()이 있으면 곧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이 있으니, 때문에 옛날 사람이 성에 따라 {문으로} (=字音)를 만들었다. {로써} {사람들이 서로} 만물의 정을 통하였고, 삼재의 도를 실었기에, 뒷세상에서 {자를} 바꿀 수 없었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가 구별되고 성의 기운도 역시 {풍토를} 따라 다르다. 대개 외국의 말은 그 성은 있으나 그 자는 없어서, 중국의 자를 빌려서 그 쓰임에 통하니, 이는 자루와 구멍이 어긋난 호미이다. 어찌 능히 통달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요는 모두 각 처지에 따라 편안하면 되지, 강제로 같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 동방의 예악문물은 화하에 견줄 수 있으나, 다만 방언과 리어는 {예악문물과} 더불어 같지 않아서{다만 방언과 리어는 예악문물처럼 화하에 견줄 수 없어서}, 학서자는 그 지취의 이해하기 어려움이 근심이고, 치옥자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이 병이어서, 옛 신라의 설총이 이두를 시작하여 관부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자를 빌려서 사용하기에 혹은 껄끄럽고 혹은 막힌다. 더구나 비언과 루언이라 논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 사이에서는 그 만분의 일도 통하지 않는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면서, 예의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모양(象形)과 자음()은 고전(古篆=古字)을 모방하여서 성()에 따른 음()은 칠조에 맞고, 삼극의 뜻()과 이기의 묘()를 포괄(該括)하지 않음이 없다. 28자로써 전환함이 무궁하면서도{28자로써 조합 가능한 글자 수가 무수히 많으면서도}, 간단하게 익힐 수 있고, 정밀하게 통달할 수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이 되기 전에 익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 이로써 책을 언해(諺解)하면 그 뜻을 알 수 있고, 이로써 송사를 청단하면 그 사정을 파악할 수 있다. 자운 즉 청탁의 분명함(能卞)과 악가 즉 율려의 조화로움(克諧), 쓸 데 없이 갖추지 않고{쓸 모 없는 것은 아예 없고}, 갈 곳 없이 이르지 않아서{막다른 골목에는 아예 들어서지 않아서}, 비록 바람 소리, 학의 울음,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라 하더라도 모두 실어서 적을 수 있다.

 

드디어 명을 내려 해석을 상세히 더하여 모든 사람을 깨우치게 하시니, 이에 신이 집현전 응교 최항,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 수찬 성삼문, 돈녕주부 강희안, 행 집현전 부수찬 이개와 이선로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와 예를 제작하여 그 대략(梗槪)을 펼쳐서, 대체()로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이 스스로 깨닫게 한다.

 

이와 같은(), 그 연원의 정밀한 뜻의 묘는 신 등이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서, 제도를 시행하는 능력이 백배나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선대의 것을 본받지 않고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어찌 그 지극한 이치가 무소부재하여 인위적인 사심이 아니겠는가?{그 지극한 이치가 편재하므로 인위적인 사심이 아니다!} 대저 동방에 나라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개물성무의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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