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폐하
전하와 폐하
쓰다 보니 길어져서 이렇게 따로 글을 올립니다.
천제(天帝), 천황(天皇), 천군(天君)은 모두 다 ‘하늘나라 임금’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렇지만, 帝, 皇, 君 등이 단순히 임금이라는 동일한 뜻이라 하기 보다는, 원래는 어감이 다른 나름의 뜻을 가지고 있었을 터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다가, 진시황이 자신을 높이기 위해 ‘고대의 고귀한 호칭’을 빌려서, 三皇+五帝에서 따와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삼항오제는 천제와 천황 중에 특별한 이를 경애하여 3과 5라는 숫자에 맞춰 만들어낸 용어입니다. 이후 중국의 다른 왕들도 황제라는 칭호를 계속 이어서 썼지만, 중국 황제의 지위는 천제가 아닌 천자입니다. 즉, 지위는 천자인데 호칭은 천제에 해당하는 이름을 쓴 것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천자가 황제라는 이름을 써서는 안 됩니다. 오류가 그대로 굳어져서 사용된 것입니다.
또, 天君에서 알 수 있듯이 君도 원래는 하느님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후대에 제후나 왕자를 뜻하는 단어로 격하됩니다. 이처럼, 당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호칭의 존대나 격하가 바뀌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바로잡히지 않고 굳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궁전(宮殿)의 시작은 당연히 하늘궁전입니다. 궁전은 땅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하늘을 땅으로 옮겨와서 하느님이 사는 곳이 바로 궁전입니다. 당시의 종교관과 세계관이 그러합니다. 왕이나 황제는 하느님의 강림 또는 하늘아들님의 강림이기에, 궁전은 하늘궁전만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궁전이 있고 땅의 궁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궁전만 있습니다. 따라서, 궁전이라 하면 하늘궁전을 말하는 것이고, 궁전에 사는 왕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궁전의 궁은 왕이 거주하는 영역을 말합니다. 궐로 둘러싸인 넓은 지역을 궁이라 합니다. 전은 궁 안에 있는 건물들을 말합니다. 원래는 왕이 있는 곳만을 가리켰을 수 있지만, 궁 안의 다른 건물들도 전이라 합니다. 일반적인 집과는 다르고,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여러 행사 때의 본부석에 설치하는 천막과 같은 지붕을 말합니다. 전하라는 호칭의 전은 궁 안의 많은 전 중에서, 당연히 왕이 머무르는 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전하(殿下)는 ‘전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폐하(陛下)의 폐는 궁전의 계단, 전의 계단을 말합니다. 궁전이 하늘궁전이고 전이 하늘의 전이므로, 폐 역시 하늘계단(天陛)이 됩니다. 따라서, 폐하는 ‘하늘계단의 아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늘계단의 위, 하늘궁전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이고, 하늘계단의 아래에 있는 사람은 하늘아들(天子)이 됩니다. 그러니, 전하가 폐하 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맞습니다.
원래, 전하라는 단어 자체가 고유명사가 아닙니다. 존칭접미사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현대의 ‘님’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전에 머무는 사람은 모두 다 전하입니다. 폐하라 불릴 등급의 사람이 황제 밖에 없으니, 폐하가 황제를 뜻하는 고유명사로 보일 수 있는 것이지, 황제급의 사람이 여럿이면, 폐하라 불리는 사람도 여럿일 수 있습니다. 기록에서는 우리가 임금만을 전하라 호칭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생활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임금은 대전마마라 하고 왕비를 중전마마라 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마마는 존칭이고, 머무르는 전의 이름을 호칭하고 있습니다. 임금을 전하라 하였지만 왕비도 전하라 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태자나 태후가 머무는 곳도 전이고 황제가 머무는 곳도 전입니다. 그러나, 황제가 전에 머문다 하여 전하라 할 수는 없습니다. 전하는 이미 하느님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황제는 하늘아들이므로 폐하라 하는 것이 맞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황제나 황족들은 계속 전에 머무릅니다. 마땅한 용어를 고르다, 황제는 폐하라는 호칭이 있으므로, 나머지 사람들은 전하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시기에 어느 지역의 특정인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특별한 호칭을 개발하다 보니, 그러한 호칭들이 쌓이고 서로 엮여서, 용어의 혼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즉, 옛날 사람이라 하여 모든 것을 올바르게 정의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보를 수집하는데 유리하고 오류를 수정하기에도 유리한, 매체가 발달한 현대에도 잘못된 단어나 용어가 만들어지고, 쓰이고, 굳어지기도 합니다. 용어들이 언제 어떻게 잘못 사용되었는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용어의 철학적 기원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설명하고 있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