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역사

훈민정음의 목적, 순경음 비읍

라무네 종교tv 2016. 10. 21. 19:56




훈민정음의 목적, 순경음 비읍




필자가 계속 주장해온 것은 ‘훈민정음 28자는 우리말(리어俚語, 한국어) 표기에 사용된 적이 없고, 우리말 표기에 사용된 것은 언문 27자이다’라는 것이다. 즉, 여린히흫과 순경음과 치두음, 정치음 등은 한자의 발음표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훈민정음은 오로지 한자의 발음표기를 위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필자의 주장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훈민정음은 여러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일까?


또, 훈민정음은 우리말 표기에 사용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우리말 표기에 ‘순경음 비읍’이 사용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이러한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정리해서 알아보자.


1. 훈민정음 28자 이전에 언문 27자가 존재하였는가?

2. 훈민정음은 오직 한자음표기를 목적으로만 만들어졌는가?

3. 우리말(리어) 표기에 순경음 비읍이 사용된 것은 무엇인가?



1.

혹자는 ‘언문 27자’에 대한 언급이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 처음 나오는 것이라, ‘훈민정음 28자’가 시간상 더 먼저라고 말한다. 따라서,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존재했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최만리의 상소문 3항에서 ‘二十七字諺文’이라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최만리상소문은 1444년 2월 20일에 있었고,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된 것은 1446년 9월이다.


그 보다 앞서, 조선왕조실록 1443년 12월 30일 두 번째 기사에서는 ‘언문 28자’라 말하고 있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바로는, 한글에 관련한 기록들 중에서 첫 기록이라 한다. 그러나, 학계가 모르는 것이 있는데, 언(諺)에 관련한 기록은 동국과 중국의 고대 기록들에서 자주 등장한다. 학계는 그것을 언어(諺語)나 언문(諺文)과 관련짓지 않고, 단순히 일상어나 비속어를 가리킬 때 쓰는 글자라고만 생각한다.


이 기사가 말하고 있는 바는, 28자의 이름은 언문이고, 언문 28자로 시행하는 정책의 이름이 훈민정음이라는 것이다. 즉, 언문과 훈민정음이 별개임을 알 수 있고, 언문 28자를 법제화한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문 27자가 맞을까, 언문 28자가 맞을까?


먼저, 制와 製의 차이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두 글자와 관련하여 국어사전과 옥편 등을 살피면, 제制는 제재制裁, 재제宰制, 제도制度, 복제服制, 제압制壓, 제어制御, 제공권制空權, 전제專制, 절제節制, 제규制規, 법제法制, 체제體制 등에 쓰여, 단순히 어떤 사물을 만들다는 뜻으로 쓰이지 않고, ‘어떤 형식이나 규칙을 만들거나 어떤 대상을 지배하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반면에 제製는 제작製作, 봉제縫製, 제약製藥, 제조製造, 제강製鋼, 법제法製, 제품製品, 제자製字 등에 쓰여 ‘어떤 사물을 만들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制는 제도나 법률 등을 만들거나 시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28자를 만들다’는 뜻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글자를 만들다’는 製字이고, 制字는 ‘글자를 제정(制定)하다’는 뜻으로서, 制만 가지고서는 ‘글자를 만든 사람’과 ‘글자를 제정한 사람’이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훈민정음과 관련하여 모든 곳에서 制가 쓰이고 있다. 製가 쓰인 곳은 거의 유일하게 언해본의 제목인 ‘세종어제훈민정음’이다. 制를 製로 잘못 쓴 것인지,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지었다는 것인지, 해석하기 애매하다. 분명한 것은 創制와 親制, 新制를 創製와 親製, 新製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필자의 글에서 밝혔듯이 상소문의 ‘27자 언문’은 착각이나 오기(誤記)가 아니다. 세종실록의 30일자 기사와 최만리상소문은, 세종의 사후에 실록을 편찬할 때 함께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정황이나 내용을 바탕으로 추정하건대, 상소문은 사초나 기록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30일자 기사는 편찬 시에 새로 집어넣은 것이다. 특정 날짜를 명시하지 않았고, 마지막 날짜인 30일의 마지막 기사에 실었고, 전체적인 평을 하면서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이라, 1443년 12월 당시의 사관의 기록이라 보기 어렵다. 즉, ‘언문 28자’는 훈민정음을 시행한 후의 기록으로서, 언문과 훈민정음을 엄격히 구별하지 않는 태도에 의해, 언문 27자라 하지 않고 언문 28자라 한 것이다. 사실상 언문과 훈민정음을 구별하기 어렵고, 굳이 구별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며, 언문 27자에다가 여린히흫을 추가하여 28자가 되었다고 하여 언문이 아니라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상소문은 1444년 2월의 기록이고 실록의 기사는 1454년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1444년 2월의 상소문에서 언문 27자이고, 1446년 9월의 훈민정음에서 훈민정음 28자이고, 세종 사후(1454)에 편찬된 조선왕조실록에서 언문 28자이고, 1527년의 훈몽자회에서는 여린히흫이 빠진 언문 27자라 하였다. 이것은, 언문 27자에 여린히흫을 추가하여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상소문의 27자에 대해 다시 정리하면,


실록 편찬자나 사관이 상소문을 옮겨 적는 과정에서 오기誤記한 것인가?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다. 1444년 2월의 사초를 기록한 사관이 정보부족으로 28자를 27자로 오기를 하였다 하더라도, 실록 편찬 과정에서 원래의 28자로 수정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또, 실록의 편찬은 세종의 사후인 1450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 때에는 28자의 훈민정음을 27자로 잘못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으므로, 편찬자의 오기가 있을 수 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27자’는 상소문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상소문에 27자라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면, 최만리 등은 왜 28자가 아닌 27자라 하였는가? 막말로 표현해서, 고의로 임금을 물먹이기 위해 28자인 것을 알면서도 27자라 한 것인가? 최만리 등은 진지하게 세종을 설득하기 위해 이 상소를 하게 된 것이라, 임금인 세종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 또, 상소문 후기에도 나오듯이, 임금과 신하의 구별은 엄격하므로 신하가 임금을 업신여기는 언행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필자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자신의 임금이 창제(創製)한 문자에 대하여 ‘야비하고 상스러운’이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당연하지만, 이 상소문에서 최만리 등은 아주 공손한 표현을 하고 있다. 따라서, 고의로 28자를 27자라 말한 것은 아니다.


고의가 아니면 실수일까? 이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은 일곱 명이나 된다.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리기 전에 일곱 명이 모두 한번 씩 읽어 봤을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일곱 명 모두가 실수를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겠는가? 또, 임금이 친히 창안한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그 정책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이 상소를 올린다는 것, 한두 명도 아닌 일곱 명 모두가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상소를 올린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상소 후기에도, 세종은 다른 사항에 반론하고 있고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라는 말에 발끈하고 있음에도,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없다. 28자이냐 27자이냐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 그러한 것인가? 세종이 언문을 창제(創製)하였다면 28자이냐 27자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신하가 상소를 하면서 자신의 임금이 만든 문자의 개수가 얼마인지도 모른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세종과 최만리 등은 언문이 본래 27자라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언문은 27자인데 세종이 한 자를 추가하여 훈민정음 28자를 만들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1443년 12월에 세종이 27자를 만들어서 이름을 언문이라 지었는데, 3년 후에 여린히흫을 추가하여 28자로 완성하여 훈민정음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는가?


실록의 30일자 기사에서는 분명히 언문과 훈민정음이 별개임을 말하고 있고, 정음청과 언문청이 따로 있었고, 훈몽자회에서 동국인인 최세진은 훈민정음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상소문 곳곳에서 언문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훈민정음 28자’ 이전에 ‘언문 27자’가 있었던 것이다.


훈몽자회에서는 마치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모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훈민정음 반포 후 80여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월인데, 훈민정음에는 없던 자음의 이름들이 정해져 있고 자모의 순서도 훈민정음과 다르다. 또, 28자에서 27자로 줄어들어 있다. 임금인 세종이 훈민정음에서 정해 놓은 것들을 별다른 이유나 과정도 없이, 흔적도 없이 변경될 수 있는가? 지금까지 모아진 학계의 설은, 최세진이 독단적으로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정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최세진이 훈민정음을 몰랐다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는,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진 것이며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최세진은 동국에서 계속 사용되던 언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알던 모르던 훈민정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언문에 익숙해 있고 훈민정음과 언문이 별다를 게 없으므로, 훈민정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문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훈몽자회에 등장하는 언문의 자모 순서나 자음의 이름 등은, 훈민정음 이전부터 존재했던 언문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훈몽자회에서 보이지 않는 ‘여린히읗’이 세종이 직접 창제한 글자라 할 수 있다. ‘여린히읗’은 오로지 한자음표기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자음표기를 위해 언문을 이용한 훈민정음을 만들면서 새로 만들어진 글자가 바로 ‘여린히읗’인 것이다.


언문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상소문의 증거들 중에 두 가지만 살펴보면,


가.

{前此吏讀, 雖不外於文字, 有識者尙且鄙之, 思欲以吏文易之, 而況諺文與文字, 暫不干涉, 專用委巷俚語者乎?

전에는 이두가 비록 문자 밖의 것이 아닐지라도 유식한 사람은 오히려 야비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써 바꾸려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專用委巷俚語者乎’의 전용專用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혼자서만 씀(대통령 전용 비행기), 오직 그것만을 씀(한글 전용), 어떤 부문에만 한하여 씀(버스 전용 차선)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또, 위항委巷은 ‘좁고 지저분한 거리, 꼬불꼬불한 좁은 길이나 좁은 골목길’이라는 뜻인데 즉, 민간民間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리고, 리어자俚語者는 ‘리어俚語를 쓰는 자者’라는 뜻으로서 동국 사람을 가리킨다. 정리하면, 專用委巷俚語者乎는 ‘오로지 위항의 리어자가 사용합니다, 오로지 위항의 리어자가 사용하는 것이겠습니까, 위항의 리어자가 전용합니다, 민간의 리어를 쓰는 자만이 사용합니다, 동국의 일반 백성들만이 사용합니다’가 되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해석할 수가 없다.


여기의 乎는 의문형이 아니라 단정(斷定)하는 의미이다. 정말로 답을 얻어내기 위해서 물어보는 의문형이 아니라, 당연한 것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설사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라고 해석된다고 치자. 이게 무슨 말인가? 필자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언문을 창제한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어 표기를 위해 언문을 창제했는데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라니, 그것도 ‘오로지’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 두 달도 안돼서 언문이 시골에만 퍼졌다?


나.

{借使諺文自前朝有之,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 오늘의 문명한 정치에 변로지도(變魯至道)하려는 뜻으로서 오히려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고쳐 새롭게 하자고 의논하는 자가 있을 것으로서 이는 환하게 알 수 있는 이치이옵니다.}


이 부분도 언문이 이미 존재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역시나 꽉 막힌 학자라는 이들은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의 차사借使는 가령假令이라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가령 언문이 전조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라고 해석을 하면서도, 가령假令은 가정假定이기 때문에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다. 가정假定은 ‘가짜로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實際가 아니므로,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세종이 창제한 것이 맞다고 말한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 ‘유치원부터 다시 다녀라’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가정假定은 ‘(어떤 일을 실제와는 관계 없이) 임시로 정함, (일정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어떤 조건을) 임시로 내세움, 사실이 아니거나 또는 사실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임시로 인정함’이라는 뜻이라 설명하고 있다. 즉, 가정한 어떤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借使(가령)’가 들어있는 문장이라 하여 그 문장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실제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실제인지 아닌지를 그 문장 내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앞뒤의 문맥을 살펴 왜 그러한 가정을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고, 그 가정이 사실로서 정한 것인지 거짓으로서 정한 것인지를 결론 내어야 하는 것이다.


3항은 언문을 이두 대신 공문서에 사용하겠다는 세종의 뜻에 반대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필자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세종이나 최만리 등을 비롯한 당시의 사람들이 보편적 가치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사대모화와 옛것이다. 그래서, 최만리 등은 이 상소문 전체에서 계속, 세종의 언문정책이 사대모화와 옛것에 위배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3항에서도 역시, 공문서에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사대모화와 옛것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통행의 문자가 아닌 동국의 언문을 천하에 퍼뜨리는 것은, 동문동궤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사대모화에 위배되고, 이미 옛것이 된 이두를 대체하여 새로이 언문을 시행하는 것은, 옛것에 위배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의 바로 뒤에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技藝)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라고 말하고 있는데, 옛것에 위배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상소문은 세종과 최만리 등의 논쟁이다. 우리가 서로 어떤 토론이나 논쟁을 할 때에, 상대방의 주장을 듣고 그에 대해 반론을 하면, 상대방이 다시 반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계속 대화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런 논쟁의 과정에서, 자신이 주장을 펼치는 순서에서, 상대방의 반론을 미리 예측하여, 가정법假定法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반론을 미리 막아버리는 논쟁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을 사용한 것이 바로 ‘借使諺文自前朝有之’이다.


최만리 등이 생각하기를, 자신들이 옛것을 논리로 하여 언문을 반대하는 주장을 펴고 있는데, 이를 세종이 잘못 이해하고, 언문이 이미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이므로, 언문이 옛것이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으므로, 그것을 미리 예측하여 반론을 전개 한 것이 바로 ‘借使諺文自前朝有之 ~ 此灼然可知之理也’이다. 따라서, ‘가령 언문이 전조(前朝) 때부터 있었다 하여도’는 ‘가령 언문이 전조 때부터 있었다 (말)한다면’이 되는 것이다. 즉, ‘가령’은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종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借使諺文自前朝有之’는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언문정책(언문을 공문서에 사용하는 정책)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라는 뜻이다. 즉,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언문정책도 고려 때 이미 시행했었다는 것이다. 시도에 그친 것인지 시행이 됐었던 것인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이 구절은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언문정책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뜻이다. 분명하게 다시 말하지만, 3항은 언문을 공문서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반대로서, 언문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이두를 대체하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借使諺文自前朝有之’가 기존의 주장대로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를 가정하는 것이고, 가정을 한 것이기에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종이 창제한 것’이라면, 바로 뒤에 따라 오는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 必有更張之議者, 此灼然可知之理也’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 부분을 알기 쉽게 의역하여 설명하면 ‘오늘날의 문명시대에는 법치가 이루어지도록 힘을 쓰는데, 오히려 위법적인 것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합니까. 반드시 법개정의 여론이 일어날 것이라, 이는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다.’가 된다. 이는, 최만리 등이 고려 때의 언문정책이 잘못된 것이라고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 때의 정책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데, 최만리 등은 ‘실패한 정책(잘못된 정책)’을 다시 시행하려는 것은 잘못이라, 반드시 고치고자 하는 여론이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지금 바로 창제한 언문을 두고, 잘못된 것을 따라 하려고 하느냐며 따지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것은, 분명히 언문정책이 고려 때부터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변로지도變魯至道는 ‘선왕의 유풍은 있는데, 그것이 행하여지지 않던 노나라를 변화시켜 도에 이르게 한다.’는 고사성어故事成語인데, 이를 비유하여 쉽게 설명하면 ‘법대로 안하던 것을 법대로 하는 것’을 뜻한다. 요즘에도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 만들어 놓기만 했지 제대로 시행하지 않는 법들 즉, 유명무실有名無實한 법률을 제대로 시행하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따라서, 變魯至道之意는 제대로 법을 행하려는 의지意志를 말한다. 정리하면, ‘以今日文明之治, 變魯至道之意, 尙肯因循而襲之乎’는 ‘비문명 즉, 폭력과 불법이 난무하는 시대가 아닌, 문명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오늘날에는, 제대로 법을 행하려고 힘쓰는데, 오히려 불법(因循)을 그대로 물려받으려 합니까?’라는 뜻이다.


이 ‘以今日 ~ 之理也’의 요점은 ‘잘못된 것을 따라하면 안 된다’이다. 세종이 언문을 창제했다는데, 뜬금없이 고려가 어쩌구저쩌구 하며 가정법을 쓰지 않나, 그 가정한 일이 잘못된 것이라 확언을 하고, 따라하면 안 된다 하니,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대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 ‘以今日 ~ 之理也’는 ‘고려 때 시행된 잘못된 언문정책을 지금 다시 따라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결론은 확실하다. ‘세종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지, ‘고려 때부터 있었다’를 가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언문이 고려 때부터 있었고 언문정책도 고려 때 이미 시행됐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언문이 동국에서 한창 잘 사용되고 있다고,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학자라는 이들은, 눈 감는 순간 까지도 양심을 팔려 할 것이다. 이것 보다 얼마나 더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어야,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겠는가?


2.

훈민정음이라는 단어에서, 훈민정음서문에서, 정인지후서에서, 최만리 상소문에서, 동국정운을 비롯한 여러 운서에서,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기 위해 정음 28자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목적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는가?


부엌칼을 만든 목적은 부엌에서 요리하기 위해서이다. 혹자가 부엌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다고 하여, 부엌칼을 만든 목적이 애초부터 다목적이라 할 수 있는가?


설령, 훈민정음 28자가 한자의 발음표기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하여도,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은 오로지 한자의 발음표기에 있다. 즉, 훈민정음의 목적과 훈민정음이 사용된 용도는 별개의 일인 것이다.


3.

필자가 계속 주장하기를, 우리말 표기에 훈민정음이 사용된 적이 없고, 우리말 표기에 사용된 것은 언문이라 하였는데, 이런 주장을 하는 데에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있었고, 모든 고전들에서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이 한자의 발음표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더구나 중국인을 위해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말 표기에 사용된 것은 언문이 아니겠는가? 너무나 당연히, 우리말 표기에 훈민정음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필자의 주장은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아무리 필자의 주장이 맞다 하더라도, 실제로 우리말 표기에 훈민정음이 사용된 적이 없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실제로 훈민정음이 우리말 표기에 사용되었다면, 이 부분에 있어 결과적으로 필자의 주장이 틀린 것이 된다. 이 주장이 틀림으로써 다른 주장의 신뢰성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필자의 다른 주장들도 함께 부정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혹자는 일부의 오류가 곧바로 전체의 오류로 이어지고, 그 사람의 성품에도 연결되는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필자의 신뢰성 회복을 위해, 실제로 우리말 표기에 순경음 비읍이 사용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살펴보면 여린히흫과 순경음, 치두음, 정치음 등이 우리말 표기에 사용된 적이 없다. ‘순경음 비읍’만을 제외하고 그렇다는 것이다. 순경음 비읍을 제외하면 필자의 주장이 맞게 된다. 그러면, 순경음 비읍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필자의 주장이 틀렸는가?


훈민정음(해례본)을 살펴보면, 용자례에 우리말 단어들이 실려 있고, 그 중에 순경음 비읍이 사용된 단어가 두 개 실려 있다. 사비(새우)와 드븨(뒤웅박)이다. 언해본에서도 수비(쉬이)와 가배야반(배와 반의 ㅏ는 아래아)이 실려 있다. 출전을 일일이 알 수 없으나 고바(고와), 셔블(서울), 어려븐(어려운) 등 많이 있다.


이렇게 우리말 표기에 훈민정음의 순경음 비읍이 사용된 실례(實例)가 있으니, 필자의 주장인 ‘우리말 표기에 사용된 것은 언문이고 훈민정음은 우리말 표기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 되었다? 정말로 그러한가?


가. 우리말에 순경음이 있었는가?

나. 순경음 비읍이 들어있는 우리말은 우리말인가?


가.

우리말에 순경음이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보자. 순경음 비읍의 흔적이 경상도 사투리에 남아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추측일 뿐이다. <덥다 - 더워, 더버>에서 더버의 비읍이 순경음이라 하는데, 역시 추측이다. 설령 순경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 흔적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알 수 없다. 우리말에서 유래하는지 어디에서 유래하는지 알 수 없다. 순경음 자체가 중국의 운학에서 유래하고, 학계에서도 15세기 경 잠깐 동안 순경음이 우리말에 존재했었다는 아리송한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즉, 우리말에 순경음이 있었는지 어떻게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말을 살펴서 순경음에 대해 밝히는 것은 너무 어렵다.


나.

사비, 드븨, 수비 등은 우리말인가?


필자가 계속 말해 왔던 것은, 세종이 본국의 언문을 이용하여 세 가지 정책을 시행했고, 한자발음표기법인 훈민정음은 그 셋 중에 하나였으며, 세 가지 정책의 시행 장소는 중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훈민정음,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은 물론이고 제왕운기, 용비어천가, 동의보감 등도 중국에 내려 보낸 것이라 말하였다. 아울러, 중국어(文字)는 인공어로서 동방의 공용어이고, 언어(諺語)는 자연어로서 동방의 일상어라 하였다. 또한, 동국의 언어를 리어라 하고, 중국의 언어를 방언이라 한다고 하였다.


즉, 동방은 언어(諺語)라는 하나의 자연어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끼리 서로 발음이 달라졌고, 중국의 언어를 가리켜 방언(方言)이라 하였으며 동국의 언어를 가리켜 리어(俚語)라 하였다는 말이다.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도,

리어와 방언의 발음이 서로 달라지고, 자연어(방언리어)의 영향을 받은 중국어(문자=한자)의 발음도 서로 잘 맞지 않게 되어, 동국과 중국이 음성언어로 잘 통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언리어는 놔두고 중국어 발음을 통일하려 하였는데, 중국어 통일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한자의 발음표기를 더 쉽게 더 정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고, 그 필요에 알맞은 동국의 언문을 이용하여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명분은 동국과 중국이 중국어로 통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상이었으며, 현실적으로 중국어는 동국과 중국이 별개의 길을 가게 된다. 사실, 수많은 운서로도 중국내의 중국어 통일도 이루지 못했고,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도 통일을 이루지 못했으니, 훈민정음의 명분은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훈민정음(해례본)은 중국인이 읽으라고 만든 것이며, 중국인이 익혀야 하는 정음 28자가 실린 해례본, 그 해례본에 실린 우리말은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말이 되는 것이다. 즉, 해례본에서 순경음 비읍이 사용된 단어들은 우리말(리어)이 아니라 중국말(방언)이다. 순경음 비읍이 사용된 단어뿐만 아니라 다른 단어들도 모두 중국말이다. 우리말과 비슷하고, 훈민정음이 사용된 장소를 모르니, 중국말을 우리말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문자 즉, 중국어에는 순경음 등이 있는데, 중국어가 방언에 영향을 준 것인지 방언이 중국어에 영향을 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중국어와 방언 모두에서 순경음이 발견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례본의 우리말이 중국말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지만, 그렇다면 언해본의 우리말은 우리말인가 중국말인가?


필자는 며칠 전까지 언해본은 동국인이 읽으라고 만든 것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순경음 비읍과 관련하여 고찰하다 보니, 언해본 역시 중국인이 읽으라고 만든 것이며, 언해본의 우리말도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필자가 언해본이 동국인을 위해 만든 것이라 여겼던 이유는, 해례본에 없던 내용이 언해본의 말미에 추가됐는데, 그 부분을 ‘동국인이 치두음과 정치음을 익히면 중국 소리에 통할 수 있다’라고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다시 읽어보니 언해본 역시 중국인을 위해 만든 것이 분명하다.


{漢音齒聲은 有齒頭正齒之別하니

중국中國소리의 잇소리는 치두齒頭와 정치正齒의 갈라짐이 있나니

//ㅈㅊㅉㅅㅆ字는 用於齒頭하고

ㅈㅊㅉㅅㅆ자字는 치두齒頭 소리에 쓰고 =>왼쪽 획이 긴 모양

//ㅈㅊㅉㅅㅆ字는 用於正齒하나니

ㅈㅊㅉㅅㅆ자字는 정치正齒 소리에 쓰나니 =>오른쪽 획이 긴 모양

//牙舌脣喉之字는 通用於漢音하나니라

어금니와 혀와 입술과 목소리의 자字는 중국中國 소리에 통通해쁘나니라}


만약 언해본을 동국인이 읽으라고 만든 것이라면, 이 부분은 훈민정음의 목적이 한자의 발음표기에 있다는 것을 더욱 더 분명하게 해준다. 한발 더 나아가, 동국의 한자 발음을 중국의 발음에 맞추려 하였다고 해석될 것이다.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일부 학자들이 훈민정음의 목적이 한자의 발음표기에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아마도 이 부분이 그들의 주장 근거 중에 하나로 쓰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필자도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하였다는 것을, 지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이 있다. 훈민정음서문을 해석할 당시, 이 부분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었다. 중국인이 읽으라고 훈민정음을 만들었고, 그 훈민정음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동국인에게 읽으라고 언해본을 만든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동국인에게 중국 발음을 익히게 하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동국에서 중국으로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을 내려보냈다는 것은, 동국이 만든 한자 발음을 중국인들이 익히도록 한 것인데, 왜 언해본에서는 동국인이 중국발음을 익히도록 하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 그 의문이 풀렸다. 언해본도 중국인이 읽으라고 만든 것이다. 언해본에 실린 우리말은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말(방언)인 것이다.


사족을 붙여 이 부분을 해설하면,


{(지난번에 너희 중국인에게 해례본을 내려 보냈을 때에는, 치두음과 정치음을 표기하는 방법이 없었는데)

(이제 언해본을 내려 보내면서 살펴보니)

한음의 치성에는 치두와 정치의 구별이 있더라

(그래서) ㅈㅊㅉㅅㅆ자는 치두에 쓰고

ㅈㅊㅉㅅㅆ자는 정치에 쓰도록 하라

(그러나 치음을 제외한) 아설순후의 글자는 (지난번 해례본의 방식대로 표기하면) 한음에 잘 맞느니라.}


언해본의 이 부분은 동국인이 중국발음을 익히라는 말이 아니라, 중국인이 중국발음을 언문으로 표기할 때, 치두음과 정치음을 표기하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中國 소리에 통通해쁘나니라’는 동국인이 중국발음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중국인이 언문으로 중국발음을 잘 표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을 헤매게 하는 원흉인 훈민정음서문의 첫 문장을 보자.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 不相流通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나랏 말소리 듕귁과 달라 문짜로 더브러 서르 흘러통티 몯하논디라}

(편의상 아래아는 ㅏ로 표기)


선입견에 의해 우리는 지금까지, 여기에 쓰인 우리말이 우리말(한국어=리어)이라 당연하게 믿었다. 저 우리말들은 중세의 우리말이라, 현재의 우리말과 다른 것이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나, 여기의 우리말(언어)은 우리말(리어)이 아니라 중국말(방언)이었다. 중세의 리어와 현재의 리어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으나, 수많은 고전에 실려 있는 우리말(언어)을 무조건 리어라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필자가 훈민정음서문을 해석할 당시, 언해본을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우리말에 입각하여 해석하려 하였는데, 꼭 하나가 마음에 걸렸었다. 다른 단어나 구절, 문법들은 비교적 쉽게 해석할 수 있었는데, ‘(문짜)와로’와 ‘(문짜)로’가 계속 문제로 남았다. 우리말에는 여러 토씨가 있지만, 저렇게 쓰인 경우는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정확한 해석이 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서, 저 토씨들의 해석은 보류하고 해례본 즉, 한문의 해석에 주력한 다음, 언해본과 비교해 보았다. 그렇게 하여, 당시에 ‘와로, 로’를 ‘와도, 도’로 바꾸어 해석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렇게 해석하니 언해본의 첫 문장이 뜻하는 바가 더 쉽게 풀렸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계속, ㄹ이 ㄷ으로 변한 증거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이제 마침내 드디어 그 비밀이 풀렸다. ‘와로, 로’는 우리말의 토씨가 아니라 중세 방언의 토씨였던 것이다. 중세의 ㄹ이 현재의 ㄷ으로 바뀐 것이 아니었다.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로를 도로 바꾸기만 하고, 서문의 첫 문장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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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나랏 말소리 듕귁과 달라 문짜로 더브러 서르 흘러통티 몯하논디라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도 서르 사맛디 아니할쌔

나랏 말소리 듕귁과 달라 문짜도 더브러 서르 흘러통티 몯하논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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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라의 말씀이 중국에서 달라, 문자와도 (동국과 중국이) 서로 잘 맞지 아니할새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문자도 더불어 (동국과 중국이) 서로 흘러 통하지 못하는지라


훨씬 더 알아듣기 쉬워졌다. 그러나, 우리말이 아닌 방언이라서 그러한 것인지, 마냥 쉽지는 않다.


이번에는, 필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견해대로, ‘서로’가 ‘우리말과 문자’를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하여, 필자의 해석과 비교하여 보자. 즉, <서로=동국과 중국><서로=우리말과 문자>로 교체하여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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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말씀이 중국에서 달라, 문자와도 <동국과 중국이> 잘 맞지 아니할새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문자도 더불어 <동국과 중국이> 흘러 통하지 못하는지라


나라의 말씀이 중국에서 달라, 문자와도 <우리말이 문자와> 잘 맞지 아니할새

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문자도 더불어 <우리말이 문자와> 흘러 통하지 못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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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말이 되는지 어느 것이 말이 안 되는지, 필자의 해석이 맞는지 학계의 해석이 맞는지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장님이 아니라면, 눈이 달린 사람은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독자들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해례본과 언해본에서 순경음 비읍이 사용된 단어들이 있는데, 그 단어들은 우리말이 아니라 중국말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른 고전에 실려 있는 단어들도 따로 검토해보면 되겠지만, 일단 해례본과 언해본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우리말이 아닌 중국말이므로, 아직까지 필자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