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강후
'東夷...'라는 글을 접게 한 계기이며 김성겸님께 출간반대 건의를 하게 만든 원인이 바로 이 부분이므로, 이 부분 즉 천강후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천강후에 대한 저의 견해가 옳은지에 대해 송준희님을 비롯한 몇 분에게는 반드시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일히 원문을 찾아 설명드려야 하나, 정말로 그러기는 싫습니다. 다시 처음 부터 읽어 나가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가계도를 그리기는 골치 아파서 싫습니다. 솔직히, 감정상의 이유가 더 큽니다. 따라서, 기억에 의존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기억에 의존한다 하여 거짓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혹여, 저의 견해에 의심이 든다면 그 부분에 대해 직접 확인하시면 될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근친혼' 하면, (현대의 상식대로) 가까운 친척 간의 한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구리왕가에서는 아닙니다. 근친혼이라는 단어보다는 근친교배라는 단어가 더 적절해 보입니다. 기존에 알려진 바로는, 고구리 백제 신라 가야 고리의 왕가에서 근친혼이 있었다더라 정도입니다. 사실, 이 정도거나 화랑세기 정도만 되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견해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역사를 탐구하고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지, 과거를 위해서나 지식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단순한 지적 탐구를 위한 것이라면 소수의 호기심을 가진 자들만이 그 지식을 접하면 됩니다. 그것을 모든 이들에게 공개하여 각인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더우기, 해가 될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곡을 하자거나 숨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의 참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광개토제나 고구리에 대해 우상화가 필요하여 이 고구리사를 공개하여 각인시킨다면, 제가 우려하는 문제가 반드시 발생할 것입니다. 혹여, 이 고구리사의 존재감이 미약하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화랑세기 정도의 관심을 끌거나 더 나아가 환단고기 정도의 유명세를 치루게 되었을 때,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이 한국사회의 가치관, 윤리 자체를 흔들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천강후는 천원공 림의 딸입니다. 천원공은 아마 미천왕(?또는 고국원제)의 동생일 것입니다. 천강은 소수림제와 결혼(?)하여 고국원제의 며느리가 됩니다. 여기서 다른 분들은 고국원제의 시부모로서의 각별한 '며느리사랑'을 보셨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고구리사에서 정황을 살펴 보면, 고구리의 왕가는 왕이 원한다면 신분귀천, 기혼여부, 근친관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여인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씨조선 때 왕이 며느리인 빈궁을 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고구리사에 나오는 고구리왕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장제기(紀)인가 안원제기인가에 제(帝)가 동궁비를 후로 봉하려 하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고국원제가 연나라의 사신(?)을 맞는 자리에 3보라 자랑하며 해태후 친누이동생 천강을 불러 냅니다. 사실, '이런 사정(고구리왕가의 근친교배 풍속)'을 모르고 이 기사를 보면 별 일이 아닌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잘 음미해 보면 고국원제와 세 여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고국원제가 임종 전에 해태후와 천강을 애타게 찾습니다. 이 부분을 읽고도 고국원제와 천강의 사이에 대해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3보 중 누이동생의 행방이 묘연하고 임종시 찾지를 않았는데, 이는 당연한 일로서 누이동생은 이미 예전에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입니다.
해태후와 천강은 帝가 내치지 않는 한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누이동생은 어디로든지 떠나가야 합니다. 친누이를 직접 후에 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로 보이는데 시집을 갔다가 팔자가 세서 여러번 남편을 바꾼 누이를 장수제는 후에 봉하기도 합니다만, 첫(?) 결혼은 촌수가 조금 먼 친척이나 제후나 공신 등과 하게 됩니다. 제와 그만큼 가깝기 때문에 누이와 결혼하는 제후나 공신은 자신이 그만큼의 신임(?)을 받는 것으로 여길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혼인을 통한 정치인데 이런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허다합니다. 따라서, 제가 아무리 자신의 누이를 아끼더라도 누이는 아주 중요한 정치적 도구이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딱 부러지게 고국원제와 천강후가 이랬다라고 기사가 나와 있지 않으니 100%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분명해 보입니다. 제 기억으로, 고국원제 시에 천강이 아이를 낳은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장수제기에 천강후가 5조를 섬겼다는 기사와 토산후가 2조를 섬겼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이를, 천강후는 고국원제가 통치하던 때에 태어나서 장수제가 통치하던 때에 임종을 맞은 것으로 해석하거나 고국원제시에 처음으로 비빈후로 봉해졌고 장수제시 임종했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엉터리입니다. 천강은 고국원제시 태어나서 소수림제 고국양제 광개토제를 거쳐 장수제 때에 죽은 것이 맞습니다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토산후는 광개토제의 황후였으며 장수제 때 태후가 되고 장수제의 자녀를 낳았지만, 광개토제 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씨조선의 어느 신하가 3조를 섬겼다는 기사가 있는데, 그것은 그 신하가 세 임금의 재위시에 각각 특정한 벼슬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세 임금과 직접적인 주종(君臣)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5조를 섬겼다는 것은 다섯 제와 교배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함께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소수림제 시에 천강은 황후였습니다만 고국양제와도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난교는 용납되지 않아서 고국양제와 관계를 가질 수 없지만 소수림제와 고국양제의 사이가 매우 심상치 않았기에 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아마도 둘 사이는 동성애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광개토제는 소수림제의 아들이 아니라 고국양제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소수림제기에는 소수림제의 아들로 나옵니다. 그러나, 광개토제기에 보면 소수림제를 백제라 칭하고 있고 광개토제 스스로 고국양제를 아버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이는 흉기니 어쩌니 하며 광개토제가 어머니인 천강태후에게 화를 내는 구절이 있는데, 저는 처음에 이를 잘못 해석했었는데 나중에 고국양제기를 읽어 보니 의문을 풀 수 있었습니다. 고국양제가 천강후와 술을 먹고 온탕에 들어가 죽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굳이 제가 따로이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이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광개토제는 고국양제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소수림제와의 사이에 담덕, 용덕을 비롯 몇 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용덕은 기록대로 소수림제의 아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로이 설명되어 있지 않으니 일단은 기록대로 바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소수림제와 연태후 사이에 강과 평양이 태어나는데(이란성 쌍생아로 보임, 실제로는 고국원제가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음), 원래는 강이 제위를 물려 받아야 하는데 소수림제의 유언에 의해 담덕(광개토제)이 물려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러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치열한 물밑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평양이 강을 설득했다는 말이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소수림제의 유언이 거짓이었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공식적으로, 소수림제가 왕위를 동생인 고국양제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대는 소수림제 자신의 아들인 담덕에게 물려주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고국양제가 자신의 아들인 담덕에게 물려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강이 불만을 나타냈고 평양이 달랬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언이 진실이라면 강과 평양은 고국원제의 자녀였을 수 있으며 소수림제는 '씨 없는 수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평양은 광개토제 보다 16살 정도 더 나이가 많았는데, 광개토제가 죽을 당시의 나이가 38이었으므로 평양이 죽었을 때의 나이는 54세였습니다. 평양이 순(殉)한 이유는, 어쩌면 폐경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용족의 여자는 월경을 할 수 있어야 대접(?)을 받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광개토제 장수제와의 묘한 삼각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훗날, 장수제가 모후를 상당히 그리워하는 장면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애뜻한 애정 때문에 순한 것은 아닙니다. 또, 원래 부터 따라 죽는 풍습이 있었는데 추모제가 금하였었다는 것으로 보아 용족의 오래 된 풍속을 따른 것으로도 보입니다. 용족의 여인들은 다부진 데가 분명 있었습니다. 안장제의 어머니가 순한 것과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안장제의 모후는 자세한 과정이 그려지고 있지만 평양후의 경우는 별 다른 설명 없이 순했다 하니 아무래도, 광개토제와 장수제의 대화 속에(광개토제가 동궁인 장수제를 훈계한 것) 그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 형사취수제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형이 죽으면 형수(형의 재산 포함)를 물려 받는다(갖는다 보다는 물려받는다가 더 맞습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생이 죽으면 제수는 어떻게 될까요? 형사취수에 상대되는 말은 왜 없을까요? 형제가 셋 이상일 경우, 둘째가 죽으면 그 부인은 세째가 갖게 될까요? 막내가 죽으면 그 부인은 어떻게 될까요?
이때의 형(兄)이 의미하는 바는 가문의 가장(家長)을 의미하며 국가로 봐서는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생(弟)은 가문의 차기 후계자이며 국가로는 동궁을 가리킵니다. 또, 수(嫂)는 가장 또는 왕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나 재산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아야 비로소 뭔가 확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둘째나 세째가 죽으면 그 부인은 가장인 첫째의 허락하에 재가를 할 수 있거나 첫째가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죽으면 형수를 둘째(후계자)가 반드시 취하게 되고 첫째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나 권리 권한 등을 모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사취수제의 본래 뜻입니다. 형사취수제는 왕위 계승이 부자관계로 완전히 굳어지기 전의 시대, 형제간에도 왕위가 계승되었던 시대의 풍속입니다.
천강후는 광개토제가 즉위한 후에, 즉 남편인 고국양제가 죽은 후에 자녀를 거의 격년제로 많이 낳습니다. 천강태후가 낳은 아이들, 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누구이냐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다들 별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 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뭔가를 두려워하며 무의식적으로 피하려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혹자는 애인이 있었다는 둥 좌계님께서는 고국양제가 둘이라는 둥...
帝가 둘일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어느 시대에도 태양이 두개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두개라면, 그 나라는 반드시 두개로 갈라지게 됩니다. 예! 애인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소수림제나 고국양제의 또 다른 형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위에서 (형사취수제에서) 말씀 드렸듯이, 고국양제의 또 다른 형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천강후를 부인으로 맞아 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광개토제가 고국양제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강후는 광개토제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애인이 있었다치고, 그 애인과의 사이에 공개적으로 그렇게 많은 자녀를 둘 수 있을까요? 그리고, 돌림자를 써서 이름을 지을 수 있을까요? 또, (장수제는) 아이를 낳은 천강후를 찾아가 격려하고 그 아이를 안아 줄 수 있을까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고구리사의 기사를 작성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帝를 중심으로, '고구리=제'라는 등식으로 고구리사를 쓰고 있습니다. 즉, 고구리에 관계 없는 것(제와 관계 없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것은 직접, 간접으로 어떻게든 제와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직접 관계되는 것은 별다른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간접으로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개토제기에 별 다른 설명 없이 '몇년 몇월 oo후가 자녀를 낳았다'라는 기사만 달랑 실려 있다면, 그 자녀의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무조건 광개토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수제 처럼, 비공식적으로는 불륜에 의해 태어났을지라도 말입니다. 신하 누구가 언제 죽었다라는 기사가 실릴 경우, 그 사람의 족보를 나열하거나 과거지사를 들먹이면서 제(고구리)와 어떻게 연관 되었는지를 반드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사건이나 영토, 전쟁, 제후국 등 모두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개토제기에 별 다른 설명 없이 '몇년 몇월 천강태후가 아들(딸) oo를 낳았다'라는 기사가 실렸을 경우 무조건, 광개토제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광개토제가 친어머니와 그런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에, '태후가 oo를 낳았다'라는 기사에서 oo의 아버지가 광개토제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광개토제기의 기사에서 '태후'라는 단어 대신 '토산후'나 '평양후'라는 단어를 바꾸어 넣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토산후(평양후) 즉 천강태후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광개토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장수제기에서 천자무모(天子無母)라는 말도 나오고 광개토제기에서 광개토제와 동궁(장수제)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장수제 원년에, 능을 찾은 장수제와 천강후의 대화에서 '60먹은 늙은 여자가 폐하에게 미칠 수는 없다.'라는 말의 의미가 묘합니다. 산골짜기에 눈이 쌓였는데 어찌 무덤을 찾았느냐, 눈이 마을에 가득한데 어찌 백성을 돌보느냐에 이어, 천강후가 마지막에 한 말이 저 말입니다. 원래는, 늙은 여인인 자신이 아무리 백성을 돌보는데 힘을 써도 폐하보다는 못하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조금 외설스럽게 바라 보면...? 음, 아무래도 이 부분은 제가 너무 그쪽으로만 바라보는 잘못을 범한 것 같습니다.
장수제 5년에 천강상태후가 아들을 낳자 유모를 붙여 줍니다. 나이가 64세였으니 유모가 필요한 것은 맞으나 장수제의 아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용덕의 처를 유모로 붙여 줄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는, 천강후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습니다만 고구리사를 읽어 보면 고구리왕가 모두, 용족 전체의 분위기와 인식, 가치관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 중에 틀린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읽어 보시고, 그 부분들에 대해 검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속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저의 망상이라고.
이 고구리사가 의심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혜경궁홍씨 같은 경우는 본명이 따로 있었고 경의왕후, 혜빈 등의 호칭이 있는데 천강은 태어날 때도 천강이라 불리고 상태후가 되어서 까지도 천강으로만 불립니다. 저 고구리 당시에는 저런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의심이 가기는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린 모든 것이 저의 착오이기를 바라며 여러 선생님께서 올바르게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여, 사실이라면... 어찌 해야 될까요? (현대의 기준으로) 웬만한 포르노 보다 더한 이 고구리사를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東夷...'라는 글을 접게 한 계기이며 김성겸님께 출간반대 건의를 하게 만든 원인이 바로 이 부분이므로, 이 부분 즉 천강후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천강후에 대한 저의 견해가 옳은지에 대해 송준희님을 비롯한 몇 분에게는 반드시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일히 원문을 찾아 설명드려야 하나, 정말로 그러기는 싫습니다. 다시 처음 부터 읽어 나가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가계도를 그리기는 골치 아파서 싫습니다. 솔직히, 감정상의 이유가 더 큽니다. 따라서, 기억에 의존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기억에 의존한다 하여 거짓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혹여, 저의 견해에 의심이 든다면 그 부분에 대해 직접 확인하시면 될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근친혼' 하면, (현대의 상식대로) 가까운 친척 간의 한 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구리왕가에서는 아닙니다. 근친혼이라는 단어보다는 근친교배라는 단어가 더 적절해 보입니다. 기존에 알려진 바로는, 고구리 백제 신라 가야 고리의 왕가에서 근친혼이 있었다더라 정도입니다. 사실, 이 정도거나 화랑세기 정도만 되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견해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역사를 탐구하고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역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지, 과거를 위해서나 지식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단순한 지적 탐구를 위한 것이라면 소수의 호기심을 가진 자들만이 그 지식을 접하면 됩니다. 그것을 모든 이들에게 공개하여 각인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더우기, 해가 될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왜곡을 하자거나 숨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의 참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약, 광개토제나 고구리에 대해 우상화가 필요하여 이 고구리사를 공개하여 각인시킨다면, 제가 우려하는 문제가 반드시 발생할 것입니다. 혹여, 이 고구리사의 존재감이 미약하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화랑세기 정도의 관심을 끌거나 더 나아가 환단고기 정도의 유명세를 치루게 되었을 때,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이 한국사회의 가치관, 윤리 자체를 흔들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천강후는 천원공 림의 딸입니다. 천원공은 아마 미천왕(?또는 고국원제)의 동생일 것입니다. 천강은 소수림제와 결혼(?)하여 고국원제의 며느리가 됩니다. 여기서 다른 분들은 고국원제의 시부모로서의 각별한 '며느리사랑'을 보셨겠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고구리사에서 정황을 살펴 보면, 고구리의 왕가는 왕이 원한다면 신분귀천, 기혼여부, 근친관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여인을 취할 수 있습니다. 이씨조선 때 왕이 며느리인 빈궁을 취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고구리사에 나오는 고구리왕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장제기(紀)인가 안원제기인가에 제(帝)가 동궁비를 후로 봉하려 하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고국원제가 연나라의 사신(?)을 맞는 자리에 3보라 자랑하며 해태후 친누이동생 천강을 불러 냅니다. 사실, '이런 사정(고구리왕가의 근친교배 풍속)'을 모르고 이 기사를 보면 별 일이 아닌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용을 잘 음미해 보면 고국원제와 세 여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고국원제가 임종 전에 해태후와 천강을 애타게 찾습니다. 이 부분을 읽고도 고국원제와 천강의 사이에 대해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3보 중 누이동생의 행방이 묘연하고 임종시 찾지를 않았는데, 이는 당연한 일로서 누이동생은 이미 예전에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기 때문입니다.
해태후와 천강은 帝가 내치지 않는 한 옆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누이동생은 어디로든지 떠나가야 합니다. 친누이를 직접 후에 봉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로 보이는데 시집을 갔다가 팔자가 세서 여러번 남편을 바꾼 누이를 장수제는 후에 봉하기도 합니다만, 첫(?) 결혼은 촌수가 조금 먼 친척이나 제후나 공신 등과 하게 됩니다. 제와 그만큼 가깝기 때문에 누이와 결혼하는 제후나 공신은 자신이 그만큼의 신임(?)을 받는 것으로 여길 수 있고, 이것이 바로 혼인을 통한 정치인데 이런 경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허다합니다. 따라서, 제가 아무리 자신의 누이를 아끼더라도 누이는 아주 중요한 정치적 도구이기에 어쩔 수 없이 떠나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딱 부러지게 고국원제와 천강후가 이랬다라고 기사가 나와 있지 않으니 100%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분명해 보입니다. 제 기억으로, 고국원제 시에 천강이 아이를 낳은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장수제기에 천강후가 5조를 섬겼다는 기사와 토산후가 2조를 섬겼다는 기사가 등장합니다. 이를, 천강후는 고국원제가 통치하던 때에 태어나서 장수제가 통치하던 때에 임종을 맞은 것으로 해석하거나 고국원제시에 처음으로 비빈후로 봉해졌고 장수제시 임종했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엉터리입니다. 천강은 고국원제시 태어나서 소수림제 고국양제 광개토제를 거쳐 장수제 때에 죽은 것이 맞습니다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토산후는 광개토제의 황후였으며 장수제 때 태후가 되고 장수제의 자녀를 낳았지만, 광개토제 때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씨조선의 어느 신하가 3조를 섬겼다는 기사가 있는데, 그것은 그 신하가 세 임금의 재위시에 각각 특정한 벼슬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세 임금과 직접적인 주종(君臣)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5조를 섬겼다는 것은 다섯 제와 교배관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함께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소수림제 시에 천강은 황후였습니다만 고국양제와도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난교는 용납되지 않아서 고국양제와 관계를 가질 수 없지만 소수림제와 고국양제의 사이가 매우 심상치 않았기에 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아마도 둘 사이는 동성애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광개토제는 소수림제의 아들이 아니라 고국양제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소수림제기에는 소수림제의 아들로 나옵니다. 그러나, 광개토제기에 보면 소수림제를 백제라 칭하고 있고 광개토제 스스로 고국양제를 아버지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어머니는 아버지를 죽이는 흉기니 어쩌니 하며 광개토제가 어머니인 천강태후에게 화를 내는 구절이 있는데, 저는 처음에 이를 잘못 해석했었는데 나중에 고국양제기를 읽어 보니 의문을 풀 수 있었습니다. 고국양제가 천강후와 술을 먹고 온탕에 들어가 죽었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굳이 제가 따로이 해석을 하지 않더라도 이 기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들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광개토제는 고국양제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소수림제와의 사이에 담덕, 용덕을 비롯 몇 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용덕은 기록대로 소수림제의 아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로이 설명되어 있지 않으니 일단은 기록대로 바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소수림제와 연태후 사이에 강과 평양이 태어나는데(이란성 쌍생아로 보임, 실제로는 고국원제가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음), 원래는 강이 제위를 물려 받아야 하는데 소수림제의 유언에 의해 담덕(광개토제)이 물려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그러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치열한 물밑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평양이 강을 설득했다는 말이 보이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소수림제의 유언이 거짓이었을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공식적으로, 소수림제가 왕위를 동생인 고국양제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대는 소수림제 자신의 아들인 담덕에게 물려주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고국양제가 자신의 아들인 담덕에게 물려 준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강이 불만을 나타냈고 평양이 달랬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언이 진실이라면 강과 평양은 고국원제의 자녀였을 수 있으며 소수림제는 '씨 없는 수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평양은 광개토제 보다 16살 정도 더 나이가 많았는데, 광개토제가 죽을 당시의 나이가 38이었으므로 평양이 죽었을 때의 나이는 54세였습니다. 평양이 순(殉)한 이유는, 어쩌면 폐경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용족의 여자는 월경을 할 수 있어야 대접(?)을 받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광개토제 장수제와의 묘한 삼각관계에 의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훗날, 장수제가 모후를 상당히 그리워하는 장면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애뜻한 애정 때문에 순한 것은 아닙니다. 또, 원래 부터 따라 죽는 풍습이 있었는데 추모제가 금하였었다는 것으로 보아 용족의 오래 된 풍속을 따른 것으로도 보입니다. 용족의 여인들은 다부진 데가 분명 있었습니다. 안장제의 어머니가 순한 것과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안장제의 모후는 자세한 과정이 그려지고 있지만 평양후의 경우는 별 다른 설명 없이 순했다 하니 아무래도, 광개토제와 장수제의 대화 속에(광개토제가 동궁인 장수제를 훈계한 것) 그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 형사취수제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형이 죽으면 형수(형의 재산 포함)를 물려 받는다(갖는다 보다는 물려받는다가 더 맞습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생이 죽으면 제수는 어떻게 될까요? 형사취수에 상대되는 말은 왜 없을까요? 형제가 셋 이상일 경우, 둘째가 죽으면 그 부인은 세째가 갖게 될까요? 막내가 죽으면 그 부인은 어떻게 될까요?
이때의 형(兄)이 의미하는 바는 가문의 가장(家長)을 의미하며 국가로 봐서는 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생(弟)은 가문의 차기 후계자이며 국가로는 동궁을 가리킵니다. 또, 수(嫂)는 가장 또는 왕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나 재산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아야 비로소 뭔가 확 트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둘째나 세째가 죽으면 그 부인은 가장인 첫째의 허락하에 재가를 할 수 있거나 첫째가 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죽으면 형수를 둘째(후계자)가 반드시 취하게 되고 첫째가 가지고 있던 재산이나 권리 권한 등을 모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형사취수제의 본래 뜻입니다. 형사취수제는 왕위 계승이 부자관계로 완전히 굳어지기 전의 시대, 형제간에도 왕위가 계승되었던 시대의 풍속입니다.
천강후는 광개토제가 즉위한 후에, 즉 남편인 고국양제가 죽은 후에 자녀를 거의 격년제로 많이 낳습니다. 천강태후가 낳은 아이들, 이 아이들의 아버지가 누구이냐는 의문이 드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다들 별로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 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뭔가를 두려워하며 무의식적으로 피하려는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혹자는 애인이 있었다는 둥 좌계님께서는 고국양제가 둘이라는 둥...
帝가 둘일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 두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세상 어디에도 어느 시대에도 태양이 두개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두개라면, 그 나라는 반드시 두개로 갈라지게 됩니다. 예! 애인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소수림제나 고국양제의 또 다른 형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위에서 (형사취수제에서) 말씀 드렸듯이, 고국양제의 또 다른 형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천강후를 부인으로 맞아 들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광개토제가 고국양제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강후는 광개토제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애인이 있었다치고, 그 애인과의 사이에 공개적으로 그렇게 많은 자녀를 둘 수 있을까요? 그리고, 돌림자를 써서 이름을 지을 수 있을까요? 또, (장수제는) 아이를 낳은 천강후를 찾아가 격려하고 그 아이를 안아 줄 수 있을까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고구리사의 기사를 작성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을 帝를 중심으로, '고구리=제'라는 등식으로 고구리사를 쓰고 있습니다. 즉, 고구리에 관계 없는 것(제와 관계 없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기록된 것은 직접, 간접으로 어떻게든 제와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직접 관계되는 것은 별다른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간접으로 관계되는 것은 반드시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광개토제기에 별 다른 설명 없이 '몇년 몇월 oo후가 자녀를 낳았다'라는 기사만 달랑 실려 있다면, 그 자녀의 아버지는 공식적으로 무조건 광개토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수제 처럼, 비공식적으로는 불륜에 의해 태어났을지라도 말입니다. 신하 누구가 언제 죽었다라는 기사가 실릴 경우, 그 사람의 족보를 나열하거나 과거지사를 들먹이면서 제(고구리)와 어떻게 연관 되었는지를 반드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 뿐만 아니라 사건이나 영토, 전쟁, 제후국 등 모두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광개토제기에 별 다른 설명 없이 '몇년 몇월 천강태후가 아들(딸) oo를 낳았다'라는 기사가 실렸을 경우 무조건, 광개토제가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광개토제가 친어머니와 그런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에, '태후가 oo를 낳았다'라는 기사에서 oo의 아버지가 광개토제라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광개토제기의 기사에서 '태후'라는 단어 대신 '토산후'나 '평양후'라는 단어를 바꾸어 넣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 토산후(평양후) 즉 천강태후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광개토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장수제기에서 천자무모(天子無母)라는 말도 나오고 광개토제기에서 광개토제와 동궁(장수제)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장수제 원년에, 능을 찾은 장수제와 천강후의 대화에서 '60먹은 늙은 여자가 폐하에게 미칠 수는 없다.'라는 말의 의미가 묘합니다. 산골짜기에 눈이 쌓였는데 어찌 무덤을 찾았느냐, 눈이 마을에 가득한데 어찌 백성을 돌보느냐에 이어, 천강후가 마지막에 한 말이 저 말입니다. 원래는, 늙은 여인인 자신이 아무리 백성을 돌보는데 힘을 써도 폐하보다는 못하다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조금 외설스럽게 바라 보면...? 음, 아무래도 이 부분은 제가 너무 그쪽으로만 바라보는 잘못을 범한 것 같습니다.
장수제 5년에 천강상태후가 아들을 낳자 유모를 붙여 줍니다. 나이가 64세였으니 유모가 필요한 것은 맞으나 장수제의 아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용덕의 처를 유모로 붙여 줄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는, 천강후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습니다만 고구리사를 읽어 보면 고구리왕가 모두, 용족 전체의 분위기와 인식, 가치관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린 말씀 중에 틀린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읽어 보시고, 그 부분들에 대해 검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속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저의 망상이라고.
이 고구리사가 의심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혜경궁홍씨 같은 경우는 본명이 따로 있었고 경의왕후, 혜빈 등의 호칭이 있는데 천강은 태어날 때도 천강이라 불리고 상태후가 되어서 까지도 천강으로만 불립니다. 저 고구리 당시에는 저런 식으로 기록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의심이 가기는 합니다.
제가 말씀 드린 모든 것이 저의 착오이기를 바라며 여러 선생님께서 올바르게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혹여, 사실이라면... 어찌 해야 될까요? (현대의 기준으로) 웬만한 포르노 보다 더한 이 고구리사를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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