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夷 - 7. 호남, 영남의 어원과 고추의 유입시기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지만 곧 외면하는 것들이 많다. 귀찮아서, 몰라서, 불필요해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 중에 하나, 왜 전라도 지방을 호남이라 부르고 경상도 지방을 영남이라 부르는가? 이 의문은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가져 보았을 것이다. 허나 그 누구도 속 시원히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정통이나 재야를 막론하고 역사학자, 언어학자, 지리학자 등 의문을 해결할 위치에 있는 그 누구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호남과 영남의 뜻을 국어사전에서는... 호남은 '전라 남북도를 일컫는 말'이고, 영남은 '조령(鳥嶺)의 남쪽, 곧 경상 남북도를 이르는 말. 교남(嶠南)'이라고 나와있다. 호남은 한자(漢字)로 湖南이라 적고, 영남은 嶺南이라 적는다. 호(湖)는 '큰못 호, 물 호, 다섯물 호'로, 영(령, 嶺)은 '산고개 령, 재 령'이다.
결국, 호남은 어떤 호수의 남쪽, 영남은 어떤 고개(재)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학계에서는 그 호수가 무슨 호수인지 그 고개가 무슨 고개인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히 영남의 '령'이 조령이라는 정도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먼저 호남에 대해 살펴보자! 호남의 뜻이 그 어떤 호수의 남쪽지역을 가리킨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 지금 현재의 전라도 위 지역의 어디에 호수가 있는가? 호남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의 호수가 있는가? 호남의 호수는 저수지와 같은 수준의 작은 호수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아주 큰 호수를 가리킨다. 전라도 위, 경기도 아니 압록강까지 찾아 보아도 호남이라 할 정도의 호수는 눈 씻고 찾아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김제의 벽골제나 금강이 호남의 '湖'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는, 벽골제가 그 '湖'라고 하여 교과서에 실려있고 우리는 그렇게 배웠었다. 그에 반하여, 금강이 '湖'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금강은 '웅진강, 백마강' 등의 별칭을 갖고 있었는데, '湖江'이라는 별칭도 사용했다고 한다. 그 호강의 남쪽을 호남이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적어도, 그 호가 벽골제라고 하기 보다는 금강이라는 주장이 더 맞는 것 같다.
호남의 호수가 호강(금강)인가?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호남의 어원에 대해서 밝혀지지 않고 벽골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인가? 금강이 벽골제를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대륙사관이나 반도사관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왜 호남의 어원이 잊혀지고 있었던 것인가? 왜 (금)강에 湖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인가? 금강이 호수라고 착각할 정도로 큰(넓은) 강인가? [물의 양이 많지 않고 유속이 느리다]고 하여 강을 호수로 착각하거나 호수의 이미지를 금강에 별칭으로 사용했다는 말인가?
[물의 양이 많고 적음]은 강과 호수의 이미지를 구별하는 것과 무관하다. 혹여, 유속이 강을 호수로 착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속이 느린 강은 허다하게 널렸다. 또, 계절이나 강수량에 따라 그 유속은 항상 달라질 수 있다. 금강이 일년내내 강수량에 관계없이 항상 느린 유속을 갖고 있는가? 실제, 금강이 호강으로 불렸을 수는 있지만 호수로 착각할 정도의 강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은 아니다. 결국, 호강(금강)도 후대에 가져다 놓은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 그 호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호수가 중국대륙의 동정호라고 생각한다. 왜 동정호인가? 솔직히 확실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지만 정황증거는 많이 있다. 동이(구이)가 민족이동을 할 시에 같은 지명을 이주지에 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 동이만이 아니다. 세계 대부분의 민족이 다 그렇다. 그 한 예로 미국에 이주한 영국인이 좋은 보기이다. 현 중국에 현 한국의 지명과 같은 지명이 아주 많이 있다. 정통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 이유를 사대모화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고구리, 백제, 신라 또 고리가 현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주장되고 있는 현재에는, 동정호가 그 호남의 '湖'라는 주장이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동정호의 남쪽을 호남으로 북쪽을 호북이라고 부르고 있다.
전남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의 주인공이 고려말경에 영산강을 타고 화순으로 온 중국인이라는 설이 학계에 알려져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 중국인들은 현 중국호남성에서 이주해온 고리인(또는 백제유민, 동이족)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호남인이라고 부르고 그들의 정착지를 호남(지방)이라고 불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 진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예전에 대륙에서 썻던 지명을 반도로 가져온 것일 수도 있다. 설마, '호남'도 사대모화 때문에 중국의 지명을 빌려온 것이라 주장할 것인가?
영남은 鳥嶺(문경새재)의 남쪽지방, 즉 경상도를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한 게 아니다. 후대에 그럴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지, 명확하게 그 嶺(새재)이 문경의 새재라고 밝혀진 바가 없다.
나는 황당하게도, 嶺南이 히말라야 남쪽 즉 인도의 북부(동북부) 지역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럼, 당연히 鳥嶺(새도 날아 넘기 힘들 정도로 높은 고개)도 히말라야에 있게 된다.
일부에서는, 삼국의 대륙설과 관련하여 김수로왕의 가라(가야)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양자강 유역)에 있었다 주장하고 있고, 또 어떤이는 인도북부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가라가 양자강 유역에 있었던지 인도 북부에 있었던지 간에, 둘 다 영남이 히말라야 남쪽을 가리킨다는 주장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만약, 가라가 인도 북부에 있었다면... 중국대륙에 있었던 동이족들(고구리, 백제, 신라)이 가라가 병합되고 난 후 또는 그 이전 부터, 같은 동이족의 나라인 가라나 그 지역, 그 백성들을 가리켜서 영남 또는 영남인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또, 가라가 양자강 유역에 있었다 하더라도... 가라의 백성들 일부가 인도 북부(아요디아)에서 유입된 유민일 수 있고 허왕옥의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요디아 유민들이 가라의 구성원이 되었을 가능성도 부정하지 못한다.
한국고대사를 중국대륙과 만주, 한반도에만 국한해서 연구하는 시각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한국사를 정말로 올바르게 밝히고 싶다면 그 한국사의 무대를 동아시아(중국대륙과 만주, 한반도)에만 국한해서 풀이하지 말고, 인도나 중동을 포함해서 더 넓은 지역까지 연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도 동북부와 가라와의 관계나, 드라비다와 우리의 유사성에 대한 이유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혹자는 인도 동북부(또는 드라비다)와 우리 민족과의 유사성(주로 언어, 민속자료)을 가지고 우리 민족이 드라비다인과의 혼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는 드라비다 문화(인도 문화, 아리안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 부터인가 사대모화와 겸손하다 못해 자기비하에 까지 이르고 있다. 이런 주장들이 나오는 이유는, 동이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 : 사대모화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연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흔히 알고 있듯이, 대와 화가 중국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태백산, 태극 등에서와 같이 우리 민족은 큰(한, 大, 太 등등)을 숭상했다. 華(중원, 중토, 천자의 땅, 세상의 중심)도 우리 민족이 중원을 지배했을 때에는 우리가 華가 되는 것이다.
결국, 사대모화(선비정신)가 부정적인 이미지 이전에 우리 민족의 사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중원의 패권을 漢족에게 넘겨주고 난 뒤에 제후국(이씨조선)으로 전락하였고, 天子國의 지위를 지닌 한족국가(?명)를 흠모하고 섬겼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천자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기억을 잃어 버리고 스스로를 천자가 아닌 신하로 여겼으니, 大와 華인 천자국 明을 섬겼던 것은 그 당시로서는 당연한 상식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영남의 어원은 가라(가야)유민의 유입과 정착으로, 서울(나라의 중심)에서 그 유민들이 정착한 지역을 지칭하던 말로 볼 수 있다. 허황후로 인해서 인도의 아요디아와 인연을 맺은게 아니라, 김수로왕 자신이 아요디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가라와 인도 북부의 유사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단순히, 20여명의 허황후 일행이 가라로 유입된 것만 가지고 그 유사성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참고로,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인도인(아리아인, 드라비다인)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몽골로이드로 추정된다. 아니, 아요디아 백성들이 몽골로이드로 보인다. 현재 인도 북부에는 몽골로이드가 적지만 옛날에는 많았었다고 한다. 또, 인도 북부는 네팔과 접해 있다.
고추의 유입시기에 대해서 현재까지, 우리는 임진란 전후에 일본에서 들여 왔다고 배웠다. 그런데, 고추의 쓰임새(금줄, 액막이, 장담그기, 남성의 상징-단순히 모양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힘)를 생각해 볼때 임진란 이후에 들여 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치에 고추가루를 사용한 게 임란 이후라고 말한다면 몰라도, 그 유입시기가 그렇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한자 발음에서와 같이 전통사상이나 풍속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바보스럽다고 할 정도로 고집스럽게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민족성이 삼신신앙(금줄)과 같은 종교성에 외래문물을 쉽게 받아 들였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절(불교)에서도 김장을 담그는데, 당연히 육류(젖갈 등등)는 쓰지 않는다. 그와 더불어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수행에 방해가 되는 오신채[五辛菜-마늘, 파, 부추, 달래, 흥거(양파)]도 넣지 않는다. 그런데, 고추(붉은 고추가루)는 넣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 맛이 辛해도 후대(임란 이후)에 들어왔기 때문에 별 제재 없이 수용된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신선도의 갈래라고 주장 되는 불교라서 그 삼신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인가?
몇(3-4 ?)년전, 경주(?)MBC에서 제작한 네트워크다큐멘터리(지방MBC제작 - 지금도 방영)에서 신라의 향가를 주제로 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했었다.
제작팀이 중국 중남부지방(?)을 탐사 하던중에 고리마을이라는 곳을 탐방하게 되었고, 그 주민들과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반찬중에 고추가 제공되었고 그 주민들이 고추를 '고추'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중국의 다른지역에서는 고추를 '라조'라고 부른다. 고리마을이 '고리'인지 '고구리'인지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고추가 '고리'시대에도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참고로,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붉은 고추가 액막이 부적으로 애용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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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산책 (2003-09-29 20:49:58)
호남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님이 얘기한 대로, 강남백제 또는 이 싸이트에서 얘기하는 서신라와 관련하여 그 위치가 양자강 남쪽으로 볼 만한 기록들이 꽤 있으므로 동정호의 남쪽에 있는 호남성도 강남백제에 포함되었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요. 전주, 완산, 광산 등의 지명, 백제향, 흑치지방 등과 그곳 풍습이 전라도와 같은 것들이 있다는 등이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전라도 호남은 백제군보다 후대에 대륙에서 따온 지명으로 보아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호남이란 호수의 남쪽이란 뜻인데 전북의 북에는 호수가 없었으니까 거대호수가 있는 강남에서 먼저 생기고 그에서 따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요. 백제가 망한 후에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붙인 것일까요?
그런데 산책이 보기에는 예언지명의 일종입니다. 이 예언은 이미 실현된 것인데 다름 아닌 대청댐에 의해 새로 생겨난 금강의 대청호지요. 정확히 충남과 전북 사이에 있으니 글자 그대로 호남이 맞지요.
다만 어느 쪽만 맞다고 얘기하기는 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은 듭니다.
영남이 경남만 가리키는 겁니까?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영남은 경남북이고 경북과 충북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맥 때문에 생겨난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 조령뿐만 아니라 죽령도 해당되는 것 아닌가요? 또 경북과 강원도의 경계도 비슷한 상황이지요.
<영남의 어원은 가라(가야)유민의 유입과 정착으로, 서울(나라의 중심)에서 그 유민들이 정착한 지역을 지칭하던 말로 볼 수 있다. 허황후로 인해서 인도의 아요디아와 인연을 맺은게 아니라, 김수로왕 자신이 아요디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 이 경우 경남지역에 정착한 사람들 때문에 그보다 넓은 경북까지 영남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는 얘기가 되는데요?
라무 (2003-09-30 01:43:02)
저는 경남만을 영남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산책님의 말씀대로, 가라가 경남에만 있었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가 경남에만 있었다는 것은 반도사관에 의한 해석이 아닌가요?
만약, 가라가 반도에 있지 않았다면 제 글이 [경남지역에 정착한 사람들 때문에 그보다 넓은 경북까지 영남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는...]라고 해석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라가 경남을 중심으로 하여 위치해 있었고, 그 당시의 지명에 현재의 지명을 끼워 맞추다 보니 [영남이 경남만 가리키는 겁니까?]라는 질문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산책님이나 강단학계의 주장대로 가라가 현 경남에 위치해 있었다면 저의 추정은 공상소설이 되겠지요!
그러나, 만약 현 경남이 아니라면 제 주장이 틀렸다는 결론이 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물론, 맞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가라가 현 경남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 경우 경남지역에 정착한 사람들 때문에 그보다 넓은 경북까지 영남이란 말을 듣게 되었다는 얘기가 되는데요?]라는 반론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저는 제글에서 [결론적으로, 영남의 어원은 가라(가야)유민의 유입과 정착으로, 서울(나라의 중심)에서 그 유민들이 정착한 지역을 지칭하던 말로 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가라가 신라에 최종(?) 병합 된 것을 모르시지는 않겠죠?
가라가 신라에 병합되고 나서 경남지역(가라의 고토)에만 그 유민이 머물렀다는 말입니까? 가라의 유민들이 신라의 각지로 흩어졌을 것이고 김유신을 비롯해서 김해김씨가 신라의 중심세력들 중에 하나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가장 많은 성씨가 '김해김씨'입니다. 거기에 더불어 '허씨 등등(수로왕의 후손)'이 있습니다. 물론, 현 김해김씨 모두가 수로왕의 진짜 직계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김해김씨가 많아질 정도로 (신라나 고리, 조선에서) 가라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닌지요?
반도 사관에 따르더라도... 가라 유민이 현 경상도에 중점적으로 퍼지고 그들을 가리켜서 영남인, 영남지방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현 반도사관에 의하면, 통일 전에 신라는 경상도가 거의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신라나 가라의 백성들이 통일후에도 경상도에만 중점적으로 머물렀을 수 있으며, 고리로 교체되고 난 뒤에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호남인(전라도)은 백제의 후손으로 영남인(경상도)은 신라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백제(패망)의 백성과 신라(정복)의 백성이 서로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라에 융합되어 정복(통일주체)민이 된 가라유민들은 신라와 가라의 고토에만 머물렀을 수 있고, 현재의 [경상도 = 영남]이라는 공식을 성립시키면서, 지금의 조령에 '조령'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해서, 고리의 조정(개성)이나 조선의 한양(서울)에서 경상도를 영남인(가라인)이 살고 있다고 하여 영남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영남 = 현 경상남북도]인지 [영남 = 가라의 古土]인지는 더 연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는 [영남 = 경상도]이지만 [영남 = 인도 (동)북부]일 수 있다는 게 저의 주장입니다.
또 죽령에 대해서 지적을 해주셨는데, 물론 죽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영남의 嶺이 조령과 죽령을 함께 지칭하는 말이라는 지적으로 들립니다. 영남의 영이 죽령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는 지적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일반적으로 국어사전이나 다른 곳에 알려진 바에 따라서 조령만을 말한 것입니다. 영남이 죽령과 관계있다는 것은, 조령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령이 한반도에 있지 않다면, 죽령도 한반도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령이 한반도에 있지 않아도 죽령은 한반도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죽령 때문에 영남이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령만 말한 것입니다. 영남의 영이 조령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 조령이 한반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 있을 가능성을 말한 것입니다.
또, 히말라야에 고개가 하나만 있겠습니까? 조령이 거기에 있다면 죽령도 거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죽이 대나무를 말하는 것이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조령과 마찬가지로 죽령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를 먼저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죽령의 죽이 이두식으로 표기 된 것일 수도 있으니, 말 그대로 '대나무'로만 해석하는 것도 다시 살펴 볼 문제입니다.
고맙습니다.
라무 (2003-09-30 01:55:58)
참! 그리고, 제글과 관련해서 산책님의 가르침을 부탁 드립니다.
저는 가라와 아요디아의 관계가 '허왕옥 일행'에 국한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허왕옥의 일행이 가라에 왔다는 것으로만, 현 한국(언어나 풍속)과 인도의 유사성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도 북부에 있는 '가야'라는 여러 지명, 드라비다어와 한국어의 유사성, 유사한 풍속, 불교와 신선도의 관계 등등]
산책님께서는 그 유사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가르침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대사산책 (2003-09-30 16:21:32)
영남이라는 말이 인도동북부에서 유래된 지명일 것이다 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반적인 것을 얘기한 거고요. 경북과 충북 사이에는 고개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것들이 전부 경남북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 구실을 한 거지요. 그 고개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새재[鳥嶺]지요. 실제로 새재보다 조금 낮은 고개도 인근에 이화령이라고 있어요. 새재는 600미터대, 이화령은 500미터대고.
위치를 보면 조령이나 이화령은 충북의 수안보로 해서 충주로 빠져 서울로 가고 죽령은 경북 영풍에서 충북 단양으로 빠지는 길목에 있지요. 다만 통행량을 보면 조령이나 이화령이 훨씬 많아서 더 널리 알려졌을 겁니다. 죽령 같은 경우는 주로 안동을 비롯한 경북의 북부지역 사람들이 이용했을 테고 조령이나 이화령은 경북의 남부 문경, 대구 이남과 경남사람들이 주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예를 들어 울산이나 진주에서 서울로 간다 하더라도 역시 최단거리는 새재를 넘는 루트가 되겠지요. 그래서 사전에도 조령의 남으로 설명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사실은 여러 고개들을 엎어서 얘기한 것으로 보고 싶네요.
산책이 생각하는 가야와 아유타의 관계는 김병모 교수설을 맞다고 보는 건데, 이종기 선생설에 따르면 해로로 이동하였고 태국의 아요다이도 관계가 있다고 되어 있어요(책에 지도로 그렇게 표시하고 있음).
- 김수로왕비의 혼인길/김병모
- 춤추는 신녀/이종기
인도북부의 가야라는 지명은 불교와 관련된 지명일 가능성이 많고 우리 고대국가 가야와도 관련이 있을 텐데 이것은 김수로왕비의 오라버니 장유화상이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를 들여왔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고...(물고기는 수메르문명과도 관련 있다고 함)
드라비다어가 타밀어와 같은가요? 이쪽을 연구를 안해 잘 모르는데...(아마도 송호수 교수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을 듯..)
가야와 가라는 음이 비슷해서 혼용이 된 듯하고 가라는 새로운 땅[新羅]을 계속해서 개척해서 더해 나간다는 의미가 있지요. 그래서 아나가야의 고명이 신라인데 가야는 원래 전신이 변진으로 알려져 있고 변진은 진한의 일파지요. 변두진한의 준말로 보는데 대륙의 산동성이나 인근에서 김해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변두인골이 발견된다고 하지요. 산동성은 고대 진한의 고지였으므로 원래 가야인들은 산동성 근방에서 살다가 해로로 이주해온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일식관측기록 해석에서도 양자강 남에 신라가 있었던 것처럼 나타나고 대륙백제군 중에 하나가 양자강 남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꽤 있지요. 그런데 이것이 김수로왕비의 이동경로와 겹친다는 거지요. 사천성 안악, 무창이라는 지명들과 普州라는 지명 양자강 남쪽의 인도계 허씨들 등등...
그리고 新羅라는 국명은 아나가야의 고명 아시라[阿尸良]>新羅와 겹치고...그래서 西新羅라는 것은 경주신라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가야와 관련된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가야.백제가 다 망하고 후기신라 때는 경주신라와 관련이 있을 수 있겠지요만.
그리고 김성호 선생의 비류백제설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것이 산책이 보기에 변진과 겹치는 것으로 보이고 백제 진씨와 가야 김씨가 같은 성씨로 나타나고 충남, 전남북, 경남의 '빛땅'계열 지명을 두 집단이 공유한 것으로 보이고 전남 영산강유역의 고분들도 가야계로 보이고...일본서기에는 전라도도 가야영역이었던 것처럼 기술되어 있고...
삼국지의 기록으로 보아도 가야는 제철왕국으로서 철을 해외 7개국에 수출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양자강도 안방처럼 드나들 수 있었고 유사 가락국기에도 중국으로 다니는 배들 대는 항구가 따로 있었던 것처럼 기술되어 있고...그래서 가락국기의 김수로왕의 혼인도 사실은 양자강을 다니던 이들에 의해 사전에 약속이 되어 왕비일행이 김해로 건너왔다고 보거든요. 20여명이라는 수자는 믿을 게 못되요. 그보다 훨씬 많을 수 있는 거지요. 사기는 반도사관에 입각해 완전히 잘라버렸고 유사는 기술을 해도 사기 눈치보면서 제대로 못 적고...
또 지금도 김해 은하사는 장유화상이 창건했다는 기록도 있어요. 그런데 이것도 알려지기로는 후기신라의 절로 되어 있거든요. 전부 이런 식이예요...당시에 장유화상의 영향력만 해도 굉장한 거지요. 그리고 김해 허씨뿐만 아니라 경남을 본관으로 하는 趙氏, 申氏 중에도 인도계가 있다는 거지요. 왕비를 따라온 조광, 신보의 후손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보면 왕비일행이 가야에 끼친 영향은 굉장히 큰 거지요.
불교와 신선도의 관계는 불교가 신선도에서 파생되었다는 설도 있어요. 불교 발상지가 히말라야가 아니고 백두산이라는 설도 있으니까요. 네 개의 강이 큰 산에서 갈라져 사방으로 흘러나간다는 구절을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 네 개로 해석한 건데...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의 석가족이 원래 코리족이라고 해서 한국인과 같은 족이라는 설도 있어요(영국학자)
도교는 신선도를 체계화, 이론화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불교 수련법 중에 참선이 있고 그 중에 話頭禪과 默照禪이 있는데 이 묵조선이 산책이 보기에 신선도 수련법과 같아요. 그래서 불교가 신선도에서 파생되었다는 것도 생판 억지는 아닌 것 같아요. 도교나 불교보다는 신선도가 훨씬 옛날부터 있었으니까요. 5천 년도 넘지요. 왕검단군도 신선이었다고 하니까. 가야 김수로왕도 만년에 신선이 되었다고 했잖아요..
이런 쪽으로 깊이 연구할 여력이 지금은 없어요. 그냥 심증들만 가지고 있는 거지요.
라무 (2003-09-30 23:24:16)
가르침 고맙습니다.^^ 예상대로, 좋은 답변 주셔서 고맙습니다.
[20여명이라는 수자는 믿을 게 못되요]라는 말에 동감입니다. 20이라는 숫자를 못 믿는다기 보다는, 아요디아가 가라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이쪽(가라와 아요디아, 불교와 신선도 등등)에 대해서는, 나중에 제 생각을 글로 올리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읽어 보시고 평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주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제 글에 대해서도 분석평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 그리고, 타밀어가 드라비다어에 포함된다네요! 저는 전문인이 아니라, 어족이 어떻고 저떻고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단지, 타밀어가 드라비다어의 한 종류에 포함된답니다. 그리고, 한국어와의 유사성을 말하는 언어는 드라비다어 보다는 타밀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라비다어도 어느 정도의 유사성은 있다고 합니다.(타밀어가 드라비다어에 포함되니까 당연하겠죠! ^^;;;)
고맙습니다.^^
박종식 (2003-10-01 00:41:19)
현재 중국의 호남성,호북성은 동정호의
위치에 따라 정해진것 맞습니다.
그리고 조령鳥嶺으로 추측되는 것이 지금의 鷄心嶺이 아닐까요?
이 鷄心嶺이 섬서성,사천성,호북성이
만나는 경계에 있는 嶺입니다.
그리고 그주변에 지명이 竹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다는 겁니다.(竹山,竹溪)
鷄는 鳥 아닌가요? 竹이
들어가는 지명으로 유추해서 竹嶺 아닌가요?
온달이 죽령과 인연이 있고 온달이 한수를 건너 죽령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그곳은 高麗地였다가 新羅地였다가 했읍니다.
온달은
장인어른의 체면을 생각해서 물러설수없는 전투였을겁니다.
鷄心嶺이 한중동쪽의 安康, 그아래 50km 남쪽입니다.
동으로는 강한평야요,
비단이 많은 화중지방입니다.
한수하류에 그유명한 강릉이 있읍니다. 형주라고 더알려져 있읍니다.
형주고성을 강릉 고성이라 그러기도
합니다.
고려지 신라지를 반복했던 강릉이 호북성의 그강릉입니다.
온달이 갔던 鳥嶺은 지금의 鷄心嶺이 아닐까요?
지명을 바꿔도 흔적은 남는
겁니다. 닭이든 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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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영남의 기원은 박종식님의 말씀이 가장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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